2022.11.30(수)
다니엘 4:19-37(구약p.1239)
<본문>
◎ 19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다니엘이 한동안 놀라며 마음으로 번민하는지라 왕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벨드사살아 너는 이 꿈과 그 해석으로 말미암아 번민할 것이 아니니라 벨드사살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 꿈은 왕을 미워하는 자에게 응하며 그 해석은 왕의 대적에게 응하기를 원하나이다
20 왕께서 보신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으니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21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먹을 것이 될 만하고 들짐승은 그 아래에 살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었나이다
22 왕이여 이 나무는 곧 왕이시라 이는 왕이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창대하사 하늘에 닿으시며 권세는 땅 끝까지 미치심이니이다
23 왕이 보신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어 없애라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는 땅에 남겨 두고 쇠와 놋줄로 동이고 그것을 들 풀 가운데에 두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또 들짐승들과 더불어 제 몫을 얻으며 일곱 때를 지내리라 하였나이다
24 왕이여 그 해석은 이러하니이다 곧 지극히 높으신 이가 명령하신 것이 내 주 왕에게 미칠 것이라
25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 때에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
26 또 그들이 그 나무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27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니라
28 이 모든 일이 다 나 느부갓네살 왕에게 임하였느니라
29 열두 달이 지난 후에 내가 바벨론 왕궁 지붕에서 거닐새
30 나 왕이 말하여 이르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31 이 말이 아직도 나 왕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 이르되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32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라
33 바로 그 때에 이 일이 나 느부갓네살에게 응하므로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이 자랐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이 되었더라
34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35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
36 그 때에 내 총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내 나라의 영광에 대하여도 내 위엄과 광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나의 모사들과 관원들이 내게 찾아오니 내가 내 나라에서 다시 세움을 받고 또 지극한 위세가 내게 더하였느니라
37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
<해설>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느부갓네살이 꾼 꿈과 그 꿈에 대한 다니엘의 해석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에게 꿈을 통해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늘까지 닿을 만큼 큰 나무가 섰다가 이후에 그 나무가 베여 나가고 그루터기만 남게 되는 꿈이었습니다. 이때 바벨론 온 제국에 이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에 느부갓네살은 자신이 벨드사살이라 이름 붙인 다니엘에게 꿈의 해석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을 해설해 주는데 그 해설해 주는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이 꿈이 해석 될 때에 그 해석에 대한 반응인데요. 바로 다니엘의 반응과 느부갓네살의 반응입니다. 우선 느부갓네살의 반응을 살펴 볼까요?
느부갓네살은 자신이 꾼 이 꿈이 범상치 않은 꿈이라는 사실을 직감합니다. 그래서 제국에 있는 온갖 술사들을 불러들여 이 꿈의 의미를 알아보고자 시도합니다. 하지만 꿈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할 자가 없자 결국 벨드사살, 곧 다니엘에게 꿈의 해석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해 줍니다.
이때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해 줄 뿐만 아니라 느부갓네살 왕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 지도 알려주는데요. 오늘 본문 27절에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단 4:27). 이렇게 직언을 올립니다. 즉 느부갓네살에게 주어진 이 꿈의 의미는 왕이 교만한 모습과 삶으로부터 돌이켜 스스로를 낮추고 회개하며 공의로 통치할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만약 느부갓네살이 스스로를 낮추지 않고 계속해서 교만함을 유지할 경우 꿈에서 본 나무가 당한 그 일을 왕이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한 것입니다.
하지만 다니엘의 이 해석과 직언을 들은 느부갓네살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29절 말씀을 보면 무려 ‘열 두 달’, 곧 1년 동안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로 그냥 시간을 보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서, 그리고 다니엘의 해석과 직언을 통해서 알려주신 말씀에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고 그냥 넘겨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이 꾼 꿈이 지닌 범상치 않은 분위기에 반응해서 그 의미를 알아내고자 시도했지만 막상 그 꿈의 의미가 밝히 주어지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평소대로 지냅니다.
반면에 느부갓네살의 꿈에 대한 다니엘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이 자신에게 꿈을 해석해 달라는 부탁을 듣자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오늘 본문 19절 말씀에 “한동안 놀라며 마음으로 번민”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느부갓네살의 꿈에 대해 듣자 곧바로 그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그 의미를 깨달은 다니엘은 크게 놀라며 마음에 번민합니다.
다니엘이 놀라며 번민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표면적인 이유로 꿈의 해석 내용이 왕에게 매우 부정적인 내용이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괜히 꿈의 해석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 했다가 왕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면 목숨을 빼앗기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고대 세계에서는 이런 일들이 자주 있었기에 충분히 두려웠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다니엘의 모습은 자기 목숨을 빼앗기게 될까봐 놀라며 번민할 만한 인물은 아니지요. 그렇다면 다니엘이 놀라며 번민할 만한 또 다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느부갓네살의 꿈에 나타난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의 엄위로움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이 꿈에 나타난 심판의 내용은 그 꿈을 해석한 다니엘에게 임할 심판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하나님의 심판이 지닌 엄위로움 앞에 두려움과 떨림으로, 놀람과 번민으로 반응합니다. 반면에 느부갓네살은 어떠합니까? 자신에게 주어진 꿈이고, 그 꿈에서 해석된 심판의 내용이 자신에게 임할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임할 심판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놀라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당연히 자신의 기존 행태로부터 돌이키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 앞에 이 두 사람은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까? 한 사람은 자신에게 임할 것도 아닌 심판의 메시지 앞에서 마음이 놀라고 번민하는 모습을 보이는 반면 ,다른 한 사람은 자신에게 임할 심판의 메시지 앞에서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입니까?
결국 이 두 사람의 차이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얼마나 진지하게 반응하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가의 차이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의 심판이 지닌 엄위로움 앞에 진지하고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말씀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과 경외감으로 나타난 것이지요.
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고, 해석 되었음에도 그 말씀에 진지하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말씀에 대한 두려움도, 그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도 전혀 없는 모습을 보입니다.
‘교만’이란 무엇입니? ‘교만’이란, 단순히 자신을 높이는 것, 스스로를 자랑하는 것이 교만이 아닙니다. ‘교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진지하게 반응하지 않는 것이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징계 하십니다. 그들의 교만을 꺾으시고, 그들을 낮추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히 우리를 벌하거나 괴롭히기 위한 행동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은 오늘 본문 마지막에 느부갓네살의 고백처럼 하나님 말씀에 진지하게 반응하지 않던 자를 돌이켜 반응하도록 만드는 은혜의 손길입니다.
<기도제목>
1. 하나님 말씀을 진지하게 대하고,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2. 나의 뜻을 고집하는 '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겸손'의 사람이 되도록.
3. [주보 기도제목] 육신의 연약함으로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지 못하는 교우들에게 힘과 능력을 더하여 주시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