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13(월)
누가복음 17장 1-10절(신p.124)
<본문>
◎ 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2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7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해설>
오늘 함께 살펴본 본문은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첫째,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는 문제. 둘째, 형제의 죄를 용서하는 문제. 셋째, 믿음에 관한 문제. 넷째,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가져야 할 태도의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중에서 첫번째 주제인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실족하게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실족하게 한다’라는 것은 나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서 다른 누군가가 ‘시험’에 들거나 ‘믿음을 잃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믿음을 잃거나 가지지 못하는 경우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씨뿌리는 비유’를 예로 들어보자면, 말씀을 듣지만 깨닫지 못하는 경우, 환난이나 박해의 상황을 겪는 경우, 또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빠진 경우, 바로 이러한 상황들이 사람들이 믿음을 잃게 되는 일반적인 상황들입니다(마 13:18-22).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실족하게 하는 일’은 상황이 조금 다릅니다. 이것은 함께 ‘믿음 생활’을 한다고 여겨지는 자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하나님을 믿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함께 예배를 드리는 ‘형제와 자매’, 지체들로 인해 믿음을 잃게 되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일들 -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일 - 이이 땅 위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는 지체 중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일이 결코 가벼운 죄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매우 심각한 죄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죄가 얼마나 심각한 죄인지, 함께 있는 자 중에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자는,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매서 바다에 던지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십니다(2절). 참고로 ‘연자맷돌’이란 우리가 가정에서 사용하는 들기 조금 무거운 정도의 맷돌이 아니라, 가축들이 돌려야 할 만큼의 엄청나게 큰 맷돌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일을 할 바에는, 나가 죽는게 더 낫다”라는 의미이겠지요.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일을 매우 심각한 죄로 다루고 계십니다.
우선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사실은 어떤 죄가 ‘자주’,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죄라고 해서 그 죄의 심각성이 줄어드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예수님께서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일이 ‘죽어 마땅한 죄’라고 말씀하시며, 그 죄의 심각성을 경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다른 이를 ‘실족하게 하는 것’은 왜 이다지도 ‘심각한 죄’입니까? 그것은 다른 이를 실족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그 목적을 정면에서 거스르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때에 ‘개인’으로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교회’로, ‘믿음의 공동체’로 부르셨습니다. 바로 그 교회의 지체들과 공동체와 함께 믿음의 길을 걸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때로 믿음의 길을 걸어갈 때에, 우리는 다양한 상황들을 만납니다. 말씀의 진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기도 하고, 박해와 핍박을 만나기도 하고, 세상의 염려와 유혹을 마주하기도 하는 등. 우리 믿음이 흔들리거나 어려움을 겪는 다양한 상황들과 마주합니다.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믿음의 지체들과 더불어서 우리의 믿음을 잃게 만들고, 흔들리게 만드는, 다양한 상황을 앞두고, 서로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붙들어 주고, 서로 위로와 격려 가운데 함께 믿음의 경주를 완주할 수 있도록 우리를 함께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로의 부르심을 제대로 감당하기는커녕, 오히려 함께 지체로 부름 받은 자가 시험에 들어, 믿음을 일케 만드는 그런 일을 행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동이고, 우리의 정체성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훼손하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를 실족하게 하는 이 문제에 대해 매우 무겁고 심각하게 다루고 계십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에 대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습을 봅니다. 특히 이런 일들이 교회 안에서 열심을 가진 자들, 직분을 가진 자들, 많은 역할과 책임을 가진 자들에게서 종종 보이는 모습입니다. ‘권면’이라는 이름으로 ‘잔소리’를 일삼고, 성경적 ‘책망’이라는 명분으로, 마음을 할퀴고 상처주는 말들을 서슴치 않고 내뱉는 모습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다른 이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다른 이들을 실족하게 만들면서도, 일이 진행되고, 추진되는 것을 보며 스스로 ‘하나님을 섬겼다’, ‘하나님을 위해 일했다’라고 하며 자신에게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이것은 비단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일들이 아닙니다. 많은 교회들이 무리한 교회 건축, 부당한 방법으로 이루어진 목회자 청빙, 직분자 선출, 교회 세습 등으로 사람들을 ‘실족하게’ 만듭니다.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만들면서 행한 일들은 비록 따라오는 결과가 크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로 부르신 그 부르심의 목적과 정체성을 부정하며 행한 ‘매우 심각한 죄’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태도는 작은 자들을 희생하면서, 크고 위대한 일들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작은 자 하나도 소중히 여기며, 서로가 서로의 믿음을 지켜주기 위해 수고하고, 배려하고, 애쓰는 태도입니다. 바로 이 겸손과 사랑의 태도가 저와 우리 성도님들, 우리 포항대흥교회 가운데 나타나길,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제목>
1. 교회로의 부르심의 본질을 기억하며, 곁에 있는 지체를 세워주는 마음과 태도를 가지도록.
2. [주보] 하나님과 함께 함이 참 안식임을 믿음으로 고백하게 하시고,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 안식을 누리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