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25(토)
누가복음 20장 45절- 21장 4절(신p.132)
<본문>
◎ 20:45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46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7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 21:1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눅 21:2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눅 21:3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눅 21: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해설>
오늘 본문은 부자들과 가난한 과부가 헌금을 내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긴 옷을 입고 다니기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과 잔치의 높은 자리를 좋아하는 자들, 곧 서기관 같은 자들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긴 옷을 입고 다니는 자들, 문안을 받는 자들,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는 자들은 당대 사람들의 존경과 부러움을 받던 부류의 인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소위 당대 사회의 중심에 있는 부류로서, 될 수만 있다면 이런 자들과 같이 되는 것이 당시 많은 사람들의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이런 자들을 삼가라, 주의하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이런 자들을
주의하고 삼가라고 말씀하십니까? 그것은 그들이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예수님의 경고의 말씀에 이어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두 부류의 사람이 헌금하는 장면으로 이어지고 있는데요. 부자들이 헌금하는 것과 가난한 과부가 헌금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들이 헌금하는 것과 가난한 과부가 헌금하는 지켜보고 난 이후에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 많이 헌금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에서 중요한 것은 헌금의 액수보다는 진정성이다.’ 혹은 ‘1억 버는 사람이 천 만원 하는 것보다, 100만원 버는 사람이 10만원 하는 것이 훨씬 더 가치 있는 헌금이다!’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단순히 헌금에 담아내야 할 진정성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앞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의 현실이 바로 이 과부의 헌금하는 장면에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 부자들이 헌금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연히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겠지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믿는 다는 표시로서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헌금을 드리는 것, 이건 너무나도 합당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정작 이 부자들이 놓치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그들과 함께 하나님 백성으로 부름받은 과부의 형편을 돌아보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부자들이 드린 헌금보다, 그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적은 금액을 드린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더 많이 드린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과부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장면을 보며 그저 가난한 과부의 믿음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어려운 형편 중에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운데 생활비 전부를 헌금으로 드리는 모습을 그저 아름답고 귀하게만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과부의 믿음을 미화하면서, 정작 이 가난한 과부가 생활비 전부를 드릴 수밖에 없도록 만든 부자들의 악함에 대해서는 주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들의 믿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헌금을 드렸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헌금을 드리는 것, 헌금을 많이 하는 것, 여기에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정작 그들은 그들 중 하나로 있는 가난한 과부가 지금으로 치면 5천원, 만원 하는 돈을 생활비의 전부로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여기 나온 부자들이 가난한 과부의 것을 빼앗은 일이 있습니까?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자들을 향해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이 부자들이 헌금을 드릴 때에 헌금 하고 싶지 않았는데, 억지로, 마지못해,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헌금을 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분명 이들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그들의 진정성을 담아서
하나님 앞에 헌금을 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의 신앙을 지키는 문제에 있어서는 관심이 있었지만, 함께 하나님 백성으로 부름 받은 가난한 과부의 형편을 살피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분명 이들은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표현하기 위해 ‘헌금’이라고 하는 표현도 사용합니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 십일조 드리는 것조차도 거리껴 하고, 부담스러워하는 지금의 세대와 비교를 하면 얼마나 귀한 태도와 자세입니까? 하지만 결국 이들이 보여주는 신앙의 태도는 ‘자신의 구원’, ‘자신의 만족’, ‘자신의 평안’을 추구하는 모습입니다. 이들이 보여주는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자신들의 삶 전부를 변화시켜 말씀에 순종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이용하여 현세에는 평안한 삶을 누리고, 내세에는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신앙 이기주의’와 ‘신앙 개인주의’입니다. 이러한 태도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외식주의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모습과 대비를 이루는 진정한 경건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 야고보서가 이렇게 말해줍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예수님의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에, 과연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자신의 구원과 평안과 안위에만 관심을 두며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들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형제와 자매, 지체들의 형편을 살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로 그들의 필요를 채우고 공급하고자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는 자들입니까?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기꺼이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는 헌신과 헌상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영적으로 가난한 과부 보다 못한 형편에 있던 우리를 예수님과 동일하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는 상속자로 삼으시기 위해서, 친히 자기 자신을, 자기 목숨을 우리를 위한 희생 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사랑, 그 헌신, 그 내어줌에 힘입어, 우리 자신을 하나님과 지체들을 위하여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저와 우리 대흥교회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제목>
1. 나의 구원과 안위에만 관심을 두는 ‘신앙이기주의’에 빠지지 않고, 나의 구원과 안위 만큼이나, 형제와 지체의 구원과 안부에 관심을 두도록.
2. [주보] 예배의 자리를 사모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말씀을 깨닫는 지혜를 허락하시고, 주일을 사모하는 마음 주시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