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10(토)
마가복음 4장 1-20절(신p.58)
염덕균 목사
<본문>
◎ 1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
2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3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9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0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으니
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12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13 또 이르시되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14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15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16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17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18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19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20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해설>
지금까지 치유와 축귀 사역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이제는 본격적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씨가 뿌려진 네 가지 땅에 관한 비유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네 가지 종류의 땅은 길가, 돌밭, 가시떨기, 그리고 ‘좋은 밭’입니다.
길가에 뿌려진 씨앗은 새들이 와서 금방 그것을 먹어버리는데요.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으나 사탄이 그 선포된 말씀을 금방 빼앗아 갔음을 의미합니다. 돌밭에 뿌려진 씨앗은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금방 시드는데요. 이것은 말씀을 들을 때는 기쁨으로 받지만 환난과 박해가 일어나면 견디지 못하고 넘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앗은 처음에는 싹이 나고 자라는 듯이 보이지만 결국 가시떨기에 기운이 막혀 자라지 못합니다. 이것은 말씀을 듣지만 이내 세상의 염려와 세상의 욕심이 말씀을 결실치 못하도록 만듭니다. 마지막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들은 말씀이 열매를 맺으므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이처럼 네 가지 땅에 관한 비유는 곧 말씀이 주어질 때 말씀을 듣는 자들이 보이는네 가지 반응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조금만 주의 깊게 생각해보면 결국 말씀을 받는 자의 종류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한쪽은 말씀을 듣고 열매를 맺는 자들이고, 다른 한쪽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물론 길가와 돌밭, 가시떨기로 표현 된 자들이 말씀이 주어질 때 보이는 반응의 구체적인 모습과 양태는 다를 수 있습니다. 말씀이 주어지지만 처음부터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 말씀이 주어지는 순간에는 나름대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만 외부의 영향으로 인해 중도 포기하는 사람, 말씀에 반응하고, 심지어 싹을 틔우는 듯하지만 결국 열매를 결실하기까지 자라지 못하는 사람, 이렇게 차이가 나타나지요. 하지만 결국 이들 모두는 말씀을 받고 결실하기까지 자라지 않고 멈춰버린 자들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기대해야 할 모습은 ‘돌밭’의 수준에 머무르는 것도 아니고, ‘가시떨기’ 수준에 멈추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기대해야 할 모습은 ‘결실 하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결실 하는 삶’이 가능할까요? 어떠한 사람이 ‘좋은 땅’에 해당할까요? 이에 대해 본문이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바는 따로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를 보면 다른 세 종류의 땅들과 비교해 볼 때, ‘좋은 땅’에만 해당하는 특징이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열매’가 맺히는 것을 가로막는 다른 요소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앞에서 이미 언급 한 것처럼 길가는 ‘사탄’이 방해하는 자로 등장합니다. 돌밭은 ‘환난과 박해’가 방해 요소로 작용합니다. 가시떨기는 ‘세상 염려와 욕심’이 결실을 가로막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하지만 ‘좋은 땅’에는 이러한 것들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주어지는 대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땅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특징을 가지고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에게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첫 시작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즉 마가복음을 읽는 독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아는 가운데 복음서를 읽어 나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마가복음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이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알 수 있는 길은 오롯이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과 예수님께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알려주시면 알려주실수록, 계시하시면 계시하실수록 더욱 예수님을 향한 반감과 거부감을 키워나갔던 자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바로 바리새인, 사두개인과 같은 당대 유대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지식과 전제와 내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전제가, 그들 스스로 품었던 선입견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유대 사회에서 가장 경건하다 여겨지며, 가장 존경 받던 자들이 가장 강력하게 예수님을 배척했고, 그로 인해 그들이야말로 ‘결실치 못하는 땅’에 해당하는 자들임이 고스란히 드러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혹 이러한 모습이 우리에게서도 발견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에, 그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전제와 선입견. 다양한 상황과 이유들을 핑계 삼아 말씀을 수용하고, 순종하기를 거부하거나 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라기는 말씀이 주어질 때에 그 말씀 앞에 날마다 새롭게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실상을 발견하고 그 가운데 우리를 빚으시고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 ‘결실’을 서로의 모습 속에서 발견하는 저와 우리 교우들 되시길 기대합니다.
<기도제목>
1. 우리의 그릇 된 전제와 선입견으로 말씀을 판단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말씀을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2. [주보] 내일 주일 공예배는 ‘온가족 예배’로 드립니다.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드리는 예배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게 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주인 되심을 고백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