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07(수)
마가복음 2장 23절-3장 6절(신p.56)
염덕균 목사
<본문>
◎ 23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24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26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 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2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해설>
예수님께서 사람들 앞에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하더라도
예수님을 향한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은
긍정적인 기대와 호기심으로 가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며
병든 자와 귀신 들린 자들을 고쳐주시는 모습에
수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예수님을 향한 유대인들의 입장은
호의와 긍정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한 사건을 시작으로
예수님을 대하는 유대인들의 입장은
불편함과 반감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 사건은 바로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난 다음에
예수님께서 하신 발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치료하시면서
“네 병이 고침을 받았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며
“네 죄가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2:5)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이 말은 너무나도 참람한 말로 여겨졌습니다.
비록 이 예수라고 하는 자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신비로운 권능을 행하는 것은 사실이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오직 하나님만이 지니신 권한인데,
한낱 인간에 불과한 자가
하나님 행세를 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못마땅하게 여겨졌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예수님을 향한 유대인들의 마음은
긍정에서 부정으로, 호의에서 반감으로
점점 돌아서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반감을 사는 예수님의 행동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더더욱 유대인들이 반감을 일으킬 만한 일들을
계속해서 행하십니다.
어제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당시 ‘세리’라고 하는 직종은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교제의 대상도 아니고,
상종할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존재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세리 중 한 사람인 레위,
즉 ‘마태’를 제자로 부르시고
그와 더불어 교제하셨습니다.
또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일주일 중 월요일과 목요일,
한 주에 이틀 정도를 ‘금식’하는 것이
소위 ‘경건하다’ 여겨지는 자들 사이에서의
일종의 규례에 해당했습니다.
그런데 소위 ‘랍비’라 여겨지는 예수님과
그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중에서는
‘금식’을 하는 자가 없었던 겁니다.
이에 대해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 따져 묻자,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동문서답’과 같은 말로
그들의 질문을 묵살하셨습니다.
이처럼 ‘중풍병자’를 고치신 일로부터 시작 된
예수님을 향한 반감과 불편함은
예수님의 행적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더욱 고조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고조 되고 있던 때에
일종의 ‘결정타’ 같은 사건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다루는
‘안식일 논쟁’입니다.
이 안식일과 관련된 논쟁은
크게 두 가지 주제를 다루는데요.
첫 번째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다가
밀이삭을 따 먹은 사건이고,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쳐주신 사건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두 가지 사건 모두를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말하며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따지고 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흥미롭게 주목할 점은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이
‘안식일 규정’ 언급하면서
예수님을 향해 비방하며 제시하는 근거도,
반대로 이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의 비방에 대해
논박하시는 예수님의 근거도,
모두 ‘구약 성경’에 근거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이
그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예수님을 비방하고 덤벼 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출애굽기 34장 21절에 근거하여
‘안식일에 추수하는 행위’가
금지 된 것을 근거로 하여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행동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안식일에 일을 하지 말라는 규례 기대어
안식일에 손마른 자를 고쳐주신 것을
비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나름의 명분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나름의 기준이 있습니다.
심지어 그 기준을
성경 말씀으로부터 가지고 와서
예수님을 비방하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의
진짜 문제는 무엇입니까?
첫째, 그들은 ‘안식일’이 주어진
진정한 의도와 목적은 잊은 채,
그저 ‘안식일 조항’ 그 자체에
메여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허락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
곧 하나님 안에서의 평강과 복을
누리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타락한 사람의 왜곡된 본성은
안식일 규례가 주어진
원래의 의도와 목적은 묵살해버리고,
규례 그 자체, 규율 그 자체에
메이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주신 안식일 규례를,
사람을 얽어매고 지배하는
도구로 전락시켜 버린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이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근거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 나름의 명분이 있었습니다.
그들도 구약 성경에 근거하여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행적을
비난하고 비방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더욱 강하게 밀어붙이면 붙일수록,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 하면 할수록,
오히려 그들 스스로의
완악함 만을 드러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의 모습이
혹 우리 가운데도 발견되지는 않습니까?
교회 안에 존재하는
이런저런 내규와 법칙과 규율을 세우게 된
원래의 목적과 의도는 오간 데 없이,
그저 내규와 규율 자체를 지키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함께 세워 나가는 동역자로서
서로의 형편과 부족함을 살피고,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며 도와주기 위해
만들어 놓은 규율들인데,
어느 순간부터
서로를 향한 사랑과 격려와 헤아림과 위로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그저 규율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내규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방하고, 책잡고, 헐뜯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안식일이 주어진 원래의 목적을 따라
굶주린 제자들이 먹을 수 있게 내버려두셨고,
손 마른 자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바로 그 모습을 보고서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은
6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논의합니다.
우리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제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
자매를 헤아리고 안아주고자 하는 마음,
지체의 짐과 과오를 함께 짊어지고자 하는 마음,
그 마음 없이 그저 들이미는
규칙, 질서, 제도, 내규 등은
그리스도께서 피값 주고 사신 지체의
마음과 영혼에 상처를 내는 것이며,
바로 그 지체를 위하여 피흘려 죽으신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우리 서로 안아줍시다.
우리 서로 조금만 더 이해하고 헤아려 줍시다.
우리 서로 조금만 더 용납해 줍시다.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의
그 반감과 적대감 속에서도
굳이 안식일에 손 마를 자의 병을
고쳐주신 그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
우리도 기꺼이 우리 곁에 있는 지체들에게
우리의 손을 내밀어 줍시다.
그렇게 바로 이곳 가운데
하나님의 안식과 위로를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제목>
1.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사역과 성품을 본 받아, 우리 또한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의 안식을 전하는 자들 되도록.
2. 스스로 만들어낸 정장성과 합리화에 갇혀서, 타인의 영혼에 상처주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3. [주보] 속해 있는 구역과 기관 속에서 성실함으로 잘 섬기며, 서로를 잘 돌아보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