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01(토)
마태복음 8장 14-22절(신p.11)
염덕균 목사
<본문>
◎ 14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15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 18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해설>
오늘 본문 역시도 크게 두 가지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요. 하나는, 예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을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 두 사건은 한 가지 뚜렷한 대비를 우리에게 보여주는데요.
우선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치유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장모를 시작으로 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뿐만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귀신에 들려 있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귀신들을 다 쫓아내시고, 그들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때 이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회복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치유와 회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이 지닌 어떤 능력이나 조건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치유와 회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향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긍휼 덕분이었습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 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7)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우리의 연약과 질고를 짊어 지시기 위해 친히 이 땅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무리들의 병을 고치시고, 귀신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돈 없이, 값 없이 예수님께로 나아와 치유와 회복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어지는 내용은 전혀 다른 분위기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바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먼저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나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마 8:19) 서기관의 이 말에서, 우리는, 이 서기관이 예수님을 향해 얼마나 호의적인 마음을 자기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선생님’, 곧 ‘랍비’라 부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훌륭한 교사’, ‘존경할 만한 스승’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나아가 이 서기관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기꺼이 따르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 서기관이 보여주는 모습은, 예수님을 향한 존중과 공경, 나아가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고자 하는 결의도 함께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서기관의 고백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 대답하십니까? 오늘 본문 20절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 8:20)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에 대해서, 여우는 ‘헤롯’을 가리키고, 공중의 새는 로마 총독 ‘빌라도’를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헤롯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헤롯으로부터 주어지는 혜택과 보상이 있을 것이고, 빌라도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빌라도로부터 주어지는 보상과 유익이 있을 것을 기대할 수 있다는 말로 이해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에서, 여우가 헤롯을 가리키는 표현인지, 공중의 새가 빌라도를 가리키는 표현인지,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지금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표현을 통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그 일에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혜택과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한 제자와의 대화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한 제자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마 8:20) 현재 이 제자가 요청하는 것은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임종을 곁에서 지키고 난 후에,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이 제자의 요청은, 특별히 이 제자가 이기적이라거나, 자기 사적인 일에만 관심을 보인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제자가 요청하고 있는 것은 어떤 면에서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요청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이 제자를 향하여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마 8:22)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의 요청을 ‘거절’하십니다. 자식 된 도리를 다한 후에, 예수님을 따르게 해달라는 요청을 단박에 거절하신 것입니다. 어째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일까요? 왜 예수님께서는 문제 될 것이 전혀 없어 보이는 제자의 요청을 매몰차게 거부하신 것입니까?
이것은 예수님께서 아무런 감수성이나 공감대가 없는 차갑고 매정한 분이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보이시는 모습들은, 바로 이러한 모습들을 통해 한 가지 교훈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대에 필요한 ‘마음의 자세와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앞에 나오는 서기관과의 대화에서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삶에는, 세상에서 기대할 만한 보상들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어서, 아버지를 장사 지내고 난 후에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제자에게는, 그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맽겨 두고, 지금 당장 예수님을 따르라고 요청합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삶은 때로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의 일을 돌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먼저 그리스도와 그 나라를 위해서 수고하고 헌신해야 할 때도 있음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기독교 신앙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양면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기독교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이 다 ‘은혜’로 ‘값없이’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본문에 등장한 수많은 병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치유와 회복을 받은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을 성취하시는 예수님의 은혜에 기인한 것이었던 것처럼, 우리 삶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의 선물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는, 우리에게 매우 큰 헌신과 대가를 요구합니다. 그 헌신과 대가란, 그 어떤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부를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위하여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많은 신자와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크게 착각하는 부분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대속의 은혜로, 그저 천국 들어갈 자격을 얻는 정도가 아닙니다. 또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세상도 기대할 수 있을 만한 부, 명예, 권력, 건강, 장수, 성공 등과 같은 것을 하나님의 도움으로 받아서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삶의 방향과 목적과 중심이, 오롯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뜻을 따르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 지는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전 생애를 교회와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는 목회자나 선교사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예수님과 더불어 살아가기를 원하는 모든 자들에게 요구되는 삶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은 값 없이, 대가 없이, 그저 공짜로 얻는 것을 바라면서도, 정작 자기 삶의 전부를 그리스도와 그분의 나라를 위하여 내어드리는 일에는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그 결과, 주일에 예배당에 나아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으면서, 이런저런 종교적 활동들은 행하지만, 정작 일상의 다양한 부분에 있어서는 세상 사람들이 사고하는 방식과 전혀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마치 스스로가 참 기독교 신자인 것처럼 생각하며, 자신의 신앙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러한 모습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을 일컬어 ‘참된 신앙’, ‘참된 경건’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러한 모습을 가리켜 ‘우상숭배’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모습은 과연 어떠합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다르기 위해, 우리의 전부를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위하여 내어드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것으로 인해 주어질, 세상의 이런저런 혜택과 보상을 기대하는 것이 아닌, 정녕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서 참된 만족과 기쁨, 삶의 목표와 의미를 발견하고 누리는 자들입니까?
[기도제목]
1. 우리가 받은 복음은, 값 없이 받은 복음이지만, 결코 값싼 복음이 아님을 기억하며, 우리의 삶 전부를 그리스도와 그 나라를 위해 내어드릴 마음을 품도록.
2. [주보] 교회가 복음으로 세상에 소망이 되게 하시고, 그 소망으로 내일 예배에 참여하는 자들 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