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12월 1일(월) 새벽기도
본문: 로마서 9:14-29
<본문>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22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25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해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다룹니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왜 어떤 사람은 긍휼을 받고 어떤 사람은 완악해지는가?”, “하나님이 다 정하셨다면 왜 사람에게 책임이 있는가?” 이 질문들은 오늘 우리 마음에도 자주 올라오는 질문입니다. 바울은 이 질문을 피해 가지 않고 정면으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가 어떤 은혜를 입었는지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이 말씀 앞에 우리를 세우고, 믿음과 겸손으로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먼저 14-18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묻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는 긍휼을 주시고, 어떤 사람은 그 마음이 더욱 완악해지도록 내어버려 두실 때, 사람의 눈으로 보면 불공평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럼 하나님이 불의하신 것 아니냐?”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그러나 바울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15절입니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긍휼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출발점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16절은 이렇게 정리합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내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착해서도 아니고, 조금 더 영적으로 예민해서도 아닙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7-18절은 바로를 예로 듭니다.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은 바로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보이시고, 자신의 이름이 온 땅에 선포되도록 사용하셨습니다. 바로가 스스로 교만하여 마음을 강팍하게 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역사 전체를 통해 무엇을 이루실지 계획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18절은 다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이 말씀은 “도대체 누가 선택되었고, 누가 버려졌는지 내가 다 알아야겠다”는 식으로 캐묻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본래 진노의 그릇이었는데, 그런 나를 긍휼의 그릇으로 불러 주신 것이 전적인 은혜입니다”라는 고백으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자연스럽게 또 다른 질문이 나옵니다. 19절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다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라면, 사람에게 책임이 어디 있느냐, 왜 죄를 따지시느냐”라는 항변입니다. 바울은 이 지점에서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끝까지 파헤치도록 돕지 않습니다. 대신, 인간과 하나님의 자리 차이를 분명히 합니다. 20절입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여기서 핵심은, 하나님께 질문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피조물이 창조주를 심판하는 자리로 올라서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왜 나를 이렇게 만드셨습니까?”라고 하나님을 피고석에 세우는 태도는, 이미 피조물이 자기 위치를 벗어난 태도입니다.
그래서 21절에서 바울은 토기장이 비유를 듭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왜 나를 이런 모양으로 빚었느냐”고 따질 수는 없습니다. 진흙은 그저 빚어지는 존재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비유는 우리를 짓누르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매우 중요한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첫째, 우리는 진흙이라는 사실입니다. 내 인생과 내 구원이 내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토기장이 되신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우리를 빚으시는 분은 서투른 장인이 아니라, 지혜와 사랑이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은 모든 비밀을 다 이해하려고 하나님께 따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를 빚으시는 손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22-23절은 이 토기장이 비유의 무게를 더 깊이 보여 줍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은 진노의 그릇을 통해 자신의 공의를 드러내시고, 긍휼의 그릇을 통해 자신의 영광과 은혜의 풍성함을 드러내십니다. 중요한 것은 이 다음입니다.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여기서 바울은 “긍휼의 그릇”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합니다. “우리”입니다. 원래는 진노 아래 있었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긍휼의 그릇으로 택하시고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25-26절에서는 호세아서 말씀을 인용합니다.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본래 하나님 백성이 아니었던 자, 사랑받을 자격이 없었던 자를 하나님이 “내 백성”, “사랑한 자”,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시는 것이 긍휼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우리도 원래는 주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대적하며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부르셔서 주의 자녀라 불러 주셨습니다. 이것이 다 긍휼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내가 이룬 것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불러 주신 이름 안에 우리의 정체성이 있습니다.
27-29절은 이스라엘 안에서도 구원은 전적인 은혜로 남은 자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겉으로는 수가 많아도, 실제로는 “남은 자”만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29절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하나님께서 씨, 곧 남은 자를 남겨 두지 않으셨다면, 이스라엘은 완전히 심판을 받고 끝났을 것입니다. 이 말은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 속에 믿음을 남겨 두지 않으셨더라면, 우리의 가정과 교회 안에 복음의 씨를 남겨 두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이미 소돔과 고모라처럼 무너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이 새벽에 말씀 앞에 서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께서 씨를 남겨 두셨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전적인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말씀 앞에서 우리는 몇 가지를 마음에 새길 수 있습니다. 첫째,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자랑이 아니라 감사로 채워야 합니다. “내가 조금 더 열심히 살아서, 내가 조금 더 진지하게 믿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라는 고백이 우리 입술에서 흘러나오기를 원합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을 재판하는 자리에 서지 말고, 피조물의 자리, 진흙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많고, 세상을 보면 악인이 형통한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토기장이 되신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다 알지 못해도, 하나님은 진노도, 긍휼도, 심판도, 구원도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해, 자기 백성의 최종적인 선을 위해 이루어 가십니다.
셋째, 우리는 긍휼의 그릇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긍휼로 구원받은 사람은 다른 이들을 향해 정죄와 교만이 아니라, 긍휼의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아직도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 여전히 완악해 보이는 사람들을 보며, “저 사람은 틀렸어”라고 단정하기보다, “주여, 저에게 긍휼을 베푸신 것처럼, 저 사람에게도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새벽에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마음을 붙잡으셔서, 내가 진노의 그릇이 아니라 긍휼의 그릇으로 부르심 받은 은혜를 깊이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을 판단하려는 교만을 버리고, 피조물로서 겸손히 순종하며, 긍휼 받은 자답게 감사와 자비로 살아가는 교우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기도제목>
1. <말씀을 기억하며> 긍휼의 그릇으로 부르심 받은 전적인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을 판단하려는 교만을 버리고 겸손과 감사와 긍휼로 살아가게 하소서.
2. <주보 기도제목> 우리를 부르신 주님의 음성에 ‘아멘’으로 응답하고, 더욱 순종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