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03(화)
요한복음 11장 17-37절(신약p.164)
염덕균 목사
<본문>
◎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ㅇ 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해설>
사랑하시는 제자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예수님께서는
‘그가 죽을 병에 걸린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을 하시고,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중에 나사로가 죽고 말았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아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를 향해 걸음을 옮기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제자들이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쯤에는
나사로가 죽고 무덤에 들어간지
나흘이나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누군가가 죽으면
신속하게 시신을 씻기고 향품과 약품을 처리하여
시신이 부패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이렇게 한 데에는 몇 가지 연유가 있는데,
구약적인 배경으로는
시신으로 인해 땅이 부정해지지 않도록 하라는
명령을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는
어떤 사람이 죽은 다음에
영혼이 곧바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시신 주변에 3일 정도 머무르고 있다가
시신이 부패하기 시작하면 곧바로 떠난다고 여기는
일종의 미신과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죽었다고 생각되는 사람도
사흘 안에는 혹시라도
되살아날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시체를 빠르게 수습하여
최대한 부패를 지연시키고
원래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하더라도
사흘이 지난 시점에서부터는
더 이상 죽은 자가 다시 되살아 날것을
기대할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달하신 시점이,
하필이면 나사로가 무덤에 들어간지
나흘이 되는 날이었던 것입니다.
원래도 나사로가 죽은 것이 확실한데,
그 나사로가 다시 소생케 될 것을 기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마저도 끝나버린 시점인 것입니다.
나사로가 회생할 수 있다는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들은 마르다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나갔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만난 마르다는
예수님께 말씀을 드립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21)
지금 예수님께 이 말씀을 드리는 마르다는
어떤 심정으로 이 말씀을 드린 걸까요?
별다른 의미 없이,
그저 아쉬움과 슬픔의 표현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마르다와 동일한 말을
또 다른 자매 마리아도 말하는 것을 보면,
단순한 아쉬움과 슬픔의 표현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을 향한 얼마간의 서운함과 원망이
섞여 있는 표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며칠 전 자신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서
나사로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전해드렸을 때,
그때 바로 와주셨더라면
그를 살려주실 수 있을지도 않았겠느냐는
다소간의 아쉬움과 서운함, 원망이 섞인
발언으로 볼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르다가 예수님을 향해 갖고 있는
믿음이 약해졌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는
마르다의 고백에서 예수님을 향한 마르다의 믿음이
결코 흔들리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이때 마르다가 말한 ‘무엇이든지’에는
나사로가 당장 살아날 것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마르다가 기대했던 것은
죽은 나사로의 영혼을 위해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
간구해 주실 것을 기대한 거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르다를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요 11:23)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죽은 마르다의 오라비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요 11:24)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마르다는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종말의 때의 ‘부활 신앙’에 관해 고백합니다.
어쩌면 지금 마르다의 입장에서 보기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당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부활 신앙에 근거하여
마르다를 위로 하는 말로 들렸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마르다 역시도 예수님의 말씀에
“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라는 의미로 대답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순간에 마르다에게는
자신의 죽은 오라비 나사로가
당장 살아날 것이라는 기대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르다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아득히 뛰어넘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부활과 생명으로 알리셨습니다.
그렇게 자신에게 능히 죽었던 자를 다시 살릴 권능과
그에게 영생을 부여할 권한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마르다를 향해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하신 말씀이
“죽은 네 오라비 나사로가
다시 살아갈 것을 믿느냐?”라는 의미를
묻는 질문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하신 질문은
“너는 내가 부활과 생명을 주관하는
권한을 지닌 자로 믿느냐”라는
의미의 물음으로 보입니다.
이에 마르다는 대답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요 11:27)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와의 대화를 통해서
그녀를 더욱 깊고 친밀한 믿음 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렇게 마르다와의 대화를 마친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동생 마리아를 부르셨습니다.
이에 마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급히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대화를 나누시던 곳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는,
예수님을 뵙자마다 그 앞에 엎드리며 울기 시작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말하며
예수님 앞에서 울기 시작했습니다(요 11:32).
마리아 역시도 마르다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 아쉬움과 서운함, 슬픔을 토로했습니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서
함께 온 유대인들 역시도 울며
그녀의 슬픔에 동참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보시던 예수님께서는
어떤 반응을 보이십니까?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요 11:33b)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와 유대인들이
함께 우는 것을 보시고,
그것을 비통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성경은 또 어떤 모습까지 증언합니까?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 11:35)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은
함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자들을 두고 보이는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보입니다.
사랑하는 제자 나사로가 죽은 상황과
그로 인해 슬퍼하는 자들을 앞에 두고서
함꼐 슬퍼하며 우시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죽어서 무덤에 들어간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기 위해 이곳에 오셨다는 사실을.
심지어 조금 전에 마르다에게
자신을 ‘부활과 생명’으로 선언하시며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것을
암시적으로 선언하신 상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전혀 울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감정적 동요를 하실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예수님께서
지금 울고 계신 것입니다.
그냥 우는 정도가 아니라
비통히 여기며 울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지금 이 상황을 두시고
진실로 마음아파 하시며
그들의 슬픔에 동감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만들어낸 고통과 슬픔,
그리고 죄가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인
‘죽음’이 인생에 드리우는 고통과 슬픔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어차피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치실 권세를 가지고 계시고,
죽은 자를 살릴 권능을 지니고 계시니,
그러한 일들 하나하나를 두고
아무런 동요나 반응을
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로 인해 인생이 마주하는
다양한 슬픔과 고통의 현실 앞에
좌절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자들,
특히 ‘죽음’이라고 하는 현실 앞에
철저히 무능하고 무력한 상태에 놓여 있는
인생을 바라보시며
그들을 향한 안타까움을 깊이 느끼는 분이십니다.
인생을 긍휼히 여기시며 안타깝게 여기시는 이 마음은
어디서 비롯된 마음입니까?
그것은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선언하신 바,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보냄을 받아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며,
세상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에수님께서는
‘잠시 후면 내가 나사로를 다시 살릴 것이니
슬퍼할 필요나 이유가 없다’라는 식으로
반응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가져온 현실과
그 현실의 비참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의 모습에
함께 공감하시며, 함께 아파시고,
함께 눈물을 흘리시는 분이십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복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자들입니다.
복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는
죄가 가져온 비참에 놓인 자들과 함께 우셨습니다.
우리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은, 정답이 여기 있으니
그 답대로만 하면 된다고 가르치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 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받은 자들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슬퍼합니다.
우리의 눈을 들어
우리의 주변을 돌아볼 수 있길 바랍니다.
그렇게 오늘도 슬픔과 비참,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 곁을 지켜주시기 부탁드립니다.
‘말씀을 붙드는 가운데 고난을 이겨내십시요!’,
‘하나님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 있습니까?’라는 식의
정답과 같은 말들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 곁에서 함께 울어주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슬퍼하며, 곁을 지켜줄 수 있기 바랍니다.
그렇게 복음을 받은 자,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자,
하나님의 사랑을 덧 입은 자로서의 모습을
드러내는 우리가 모두가 되기를
[기도제목]
1. 그저 맞는 말, 틀리지 않은 말을 내뱉는 것으로 우리의 역할을 다 했다 여기지 말고, 고난과 슬픔 속에 있는 자들과 더불어 함께 하는 마음을 주시도록.
2. [주보] 새로운 학기와 학년을 시작하는 자녀들이 주어진 상황에 잘 적응하게 하시고, 주어진 믿음 속에서 맡은 바 역할을 성실하게 감당하도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