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27(목) 새벽기도회
본문: 창세기 38장 1-14절
<본문>
◎ 1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2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3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의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4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오난이라 하고
5 그가 또 다시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그가 셀라를 낳을 때에 유다는 거십에 있었더라
6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데려오니 그의 이름은 다말이더라
7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8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9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10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11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
12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의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의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13 어떤 사람이 다말에게 말하되 네 시아버지가 자기의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 한지라
14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음이라
<본문 해설>
오늘 본문은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한 사람 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 사이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선 본문은 ‘유다’의 행적에 대해 이야기 해주고 있는데요. 유다는 ‘형제’들로부터 떠나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때 유다가 ‘형제들로부터 떠나’,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지냈다는 것은 그저 단순히 유다가 성인이 되어 가족들로부터 독립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유다가 형제들로부터 떠났다는 것은 그가 ‘언약 백성들과의 교제’로부터 떠나
‘언약을 모르는 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대로 나아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다의 이러한 모습은 이어지는 2절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요. 유다는 ‘가나안 사람 수아’라는 사람의 딸을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여 그 여인으로부터 ‘엘’, ‘오난’, ‘셀라’ 세 명의 아들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에서와 야곱 사건에서 에서가 가나안 족속 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한 것이 이삭과 리브기에게 근심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 언약 백성의 모습으로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유다가 보여주는 모습은 하나님 언약 백성과의 교제로부터 벗어나
오히려 언약을 모르는 자들과 교제하며 언약 밖에 있는 자들과 혼인 관계를 맺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어서 12절 말씀을 볼까요? 12절 말씀을 보면 그가 자신의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양털을 깎기 위해 딤나에 이르렀다는 것은 양털 깎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던 지역 중 하나가 바로 딤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유다가 자신의 양떼를 양깍는 자들에게 맡겨야 할만큼 꽤 많은 양의 양 떼를 소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유다가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겠지요.
이처럼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유다의 모습은 ‘언약 백성’의 울타리를 떠나서 ‘가나안’이라고 하는 이방 사회에서 아주 잘 적응한 자의 모습입니다. 이방 사람들 중에서 아주 가깝게 지낼 친구를 두었고,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을 아내로 맞이 하는 등 하나님의 언약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방 사회에 잘 녹아 들어가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유다는 자신의 장자 엘을 위해 가나안 족속 여인 중 하나를 데리고 왔는데요. 그 여인이 바로 ‘다말’입니다. 그런데 유다의 장자 엘이 다말과 결혼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엘이 죽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 7절은 엘이 죽은 이유가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형제가 자식이 없이 죽으면, 죽은 형제를 대신하여, 형제의 남은 처와 동침하여 대를 이을 수 있도록 해주는 문화가 있었는데요. 나중에 이것이 신명기 25장 5-10절에 기록된 수혼법, 수혼제도라는 율법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유다도 그 관습과 문화에 따라서 오난이 엘을 대신하여 다말과 동침하고 엘의 대를 이어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유다의 둘째 오난은 자신이 다말과 동침하여 생길 아이가 자신의 자식이 되지 않을 것이 싫어서 다말과 제대로 관계를 맺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오난의 행동 역시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셨습니다.
그렇게 야곱의 첫 두 아들이 여호와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두 아들이 죽고 나자 유다는 자신의 며느리 다말에게 우선 친정 아버지 집에 거하면서 수절하고, 셋째 셀라가 장성하기까지 기다렸다가 이후에 셀라를 통해 후사를 얻으라 권합니다.
표면상으로만 보면 유다의 말은 다말을 배려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직 셋째 셀라가 장성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고, 다말에 대한 책임 역시도 잊지 않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유다의 진짜 속셈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말과 엮인 후에 자신의 두 아들 엘과 오난이 죽고 말았는데 혹여나 하나 남은 셀라마저도 죽게 될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셀라를 다말에게 주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유다는 셀라가 장성한 후에도 다말을 부르러 가거나 셀라를 다말에게 내어주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엘과 오난의 죽음이 그들의 악함 때문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다말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엘과 오난 그들 스스로의 악함이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켰던 것이지요. 하지만 유다는, 엘과 오난의 잘못으로 인한 일을 애꿎은 다말 때문인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말에 대한 책임도지지 않고 그저 다말에게만 과부로서의 몸가짐을 지킬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본문이 보여주는 유다의 모습은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 없이 살아가는 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언약 백성과의 교제를 떠나 이방 세상의 문화와 제도에 잘 적응하여 부요하게 살아가는 자의 모습,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는 두려워하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마음은 없는 자의 모습, 그렇게 하나님을 믿으나 이방 신을 섬기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믿는 모습, 명분상으로는 약자인 다말을 배려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약자를 돌아보지 않는 이기적인 모습입니다.
그는 혈통상 야곱의 아들 중 하나였고, 명분상 여호와 신앙을 소유했다 여겨졌는지 모르지만 그의 실상은 이방인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혹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또 우리와 우리 자녀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을 우리 삶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 언약 백성으로서의 자비와 긍휼, 의를 드러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기도제목>
1. 언약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늘 기억하고, 언약 안에 머무르는 삶을 살아가도록.
2. 언약 백성과의 교제 안에 머무르며, 하나님의 의와 평강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도록.
3. [주보 기도제목]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 분 말씀에 순종하고 맡기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