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20(금) 새벽기도회
사도행전 13장 13-25절(신p.209)
<본문>
◎ 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14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15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16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18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19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까지 약 사백오십 년간이라
20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21 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23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24 그가 오시기에 앞서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25 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해설>
바울과 일행들은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선교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바울과 일행들의 1차 선교 여행이 시작 된 것입니다. 이들은 실루기아와 구브로, 살라미와 바보를 지나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라고 하는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이 선교의 여정 중에 낙오자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마가라고도 불리는 요한이었습니다. 마가 요한은 선교 여정 도중에 여정을 포기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종종 사람들은 이 ‘마가 요한’이 낙오한 사실을 보고너무 쉽게 ‘마가 요한’ 개인의 연약함과 끈기 없음, 신실치 못함으로 결론 내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투철한 사명 의식 가운데 선교 여행을 성실히 잘 감당했는데 요한 마가는 그들만큼 투철하지 못해서 중간에 낙오하고 말았다는 식으로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이해는 우리가 이 요한 마가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드신 장소가 바로 ‘마가의 다락방’이었지요. 또한 예수님께서 승천 하신 후 제자들이 모여 함께 기도하던 때 성령님께서 강림하신 곳도 바로 ‘마가의 다락방’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 ‘마가’라는 인물이 참으로 경건하고 신실한 가정에서 양육 받은 인물이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또한 안디옥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할 때 그들의 수행원으로 따라 나설 만큼 헌신 된 인물이라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지요. 이렇게 볼 때 이 요한 마가는 그저 유약하고, 끈기 없고, 신실치 못한 그저 그런 인물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마가 요한의 낙오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울과 그 일행들이 감당하던 이 선교 여행, 복음 사역이 이런 신실하고 헌신 된 마가 요한 조차도 낙오하도록 만들 만큼 힘들고 수고로운 여행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을 때, 특별히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무언가 헌신 할 때, 기대하는 것 중에 하나가 내가 감당하는 그 일이 형통하고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기대하지요. 물론 아무런 고생과 고난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너무 오래는 말고 적당히, 너무 심하게는 말고 견딜 수 있을 정도로, 고난과 역경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오히려 그 정도 고생과 고난 정도는 있어줘야 또 그것을 견디고 극복한 사실에 대해 말할 거리도 있을 테니까 말이지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수고와 헌신의 자리, 특별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수고와 헌신의 자리들은 적당한 역경과 고난, 수고의 과정을 지나고 나면 결국에는 ‘해피엔딩’이기를 기대하는 경우들이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보여주는 바울과 그의 일행들이 감당한 선교 여행은 우리가 기대하는 식의 순조롭고, 형통하고, 안전한 여정이 아니었습니다 그 경건하고 헌신 된 마가 요한 조차도 중간에 낙오하도록 만들 정도의 수고롭고 힘든 강행군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본문이 보여주는 내용이 그저 ‘마가 요한도 포기한 그 여행을 바울과 나머지 일행들은 충실하게 감당했다.’ ‘그러니 나머지 일행들이 마가 요한보다 더 충성되고 신실하다!’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본문이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마가 요한과 나머지 일행들을 비교하거나 대조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허락하신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어떠한 각오가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4장 28~33절을 보면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망대를 세우고자 하는 자는 망대를 세우기까지 그 비용을 계산해서 망대를 세우기 전에 예산을 다 써버려서 완공을 하지 못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를 마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데요.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돈도, 재산도, 집도 다 가져서는 안 된다.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며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을 적당히 헌신하면, 적당히 보상받고, 인정받고, 칭찬 받고, 영광과 명예를 누릴 수 있으리라는 식의 가벼운 마음으로 생각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볍고 경솔한 마음으로 주를 따르고, 주를 위해 헌신한다고 뛰어들다가 중도에 포기하게 되는 일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바울 사도와 같이 직접적으로 선교 여행을 떠나거나,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감당하는 목사나 선교사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이런 각오와 다짐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의 이름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와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며 그분의 부르심을 감당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적당히 예배드리고, 적당히 성경 보고, 적당히 교회 사람들 만나고, 적당히 헌금 내고, 적당히 헌신하면, 괜찮다는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삼아 예수님의 교회와 지체로 살아간다는 것은 주께서 요구하시는 자리와 모습에 우리 자신을 기꺼이 내어드릴 각오와 다짐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자신을 내어 드리더라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것이 훨씬 더 크고 값진 것임을 기억하며, 또한 우리가 기대하고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갚아 주실 것임을 믿고 신뢰하는 가운데 걸어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과 신뢰 가운데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기꺼이 내어드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게 주께서 우리를 불러 주신 자리라면, 어떤 상황과 모양이라 하더라도 기꺼이 우리 자신을 내어 드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기도제목>
1.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독생자와 그분을 믿는 믿음, 그 믿음을 통해 주어지는 영생과 구원을 허락해 주셨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주시길.
2. 주께서 부르신 자리 가운데 우리 스스로를 내어드릴 수 있는 믿음 주시길.
3. [주보 기도제목] 병 중에 치료 받고 있는 성도들과 간병하는 가족들에게 회복과 위로의 은혜를 더해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