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30(토)
요한계시록 22장 6-21절(신p.422)
염덕균 목사
<본문>
◎ 6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8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9 그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10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11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15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18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해설>
오늘 본문은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이자, 성경 전체의 마지막에 계시에 해당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 된 내용을 아주 짧게 정리 하자면, “내가 속히 오리라!”라고 말씀하시는 우리 예수님의 약속과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하는 교회의 요청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재림에 대한 예수님의 약속과 그 예수님의 약속에 대한 성도들의 간절한 바람과 요청을 다루고 있습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여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시는 예수님께서 교회를 향해 반복해서 하시는 말씀, 그것은 바로 “내가 속히 오리라!”(12, 20절)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내가 속히 오리라”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이 약속이야말로 이 땅을 살아가는 신부인 교회의 가장 큰 위로이자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사실이 어째서 큰 위로와 소망인지 알기 위해서는 이 땅의 교회가 속해 있는 현실이 어떠한 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는데요. 한 예로, 이 요한계시록이 처음 주어지던 당시 성도들의 상황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 심각한 차별과 핍박을 받고 있었고, 여러 가지 손해와 억울한 일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만 보면,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이 핍박은 그야말로 ‘영원’할 것만 같이 느껴지던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교회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내가 속히 오리라!”라는 말씀으로 그들을 위로하십니다. 영원할 것만 같은 핍박과 박해도 결코 계속되지 않을 것이며, 나아가 성도들을 핍박하던 자들을 향한 우리 주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내가 속히 오리라!”라는 예수님의 이 약속의 말씀은 말씀을 따라 살아가면서 갖은 박해와 손해 가운데 살아가던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그야말로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요, 참된 위로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또 하나의 예로 이 요한계시록 말씀은 일제강점기를 겪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한줄기 큰 희망과 위로로 다가왔습니다. 계시록 말씀을 읽던 성도들 일제의 강압 통치가 영원하지 않고 반드시 그 끝이 있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일본 제국은 이 요한계시록 말씀을 금서의 목록에 포함시키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이 약속의 말씀. “내가 속히 오리라”라는 이 말씀은, 이 땅에 발 딛고 살아가는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에게는 참으로 큰 위로와 소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 약속의 말씀을 받은 성도들이 보일만한 자연스러운 반응, 그것이 바로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이 고백이 진실로 우리 마음의 간절한 소망입니까? 정말 우리는 예수님께서 속히 이 땅 가운데 오시기를 기대하고 있습니까?
청년 시절에 한 교회 선배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건 좋은데, 그래도 내가 결혼은 하고 나서 오시면 좋겠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또 옆에 있던 다른 선배는 “천국 가는 건 좋은데, 지금 당장은 가고 싶지 않다. 지금 당장 천국에 들어가기에는 이 땅에서의 삶이 너무 즐겁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위 두 이야기는 농담처럼 주고 받은 이야기들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이 땅을 살아가는 많은 성도들의 실체를 보여주는 표현이 아닐까요?
“내가 속이 오리라”라고 하는 이 예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가 될 만큼...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이 고백이 우리의 간절한 소망과 기대가 될 만큼, 우리는 세상을 미워하지도,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다지도 어정쩡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걸까요?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우리 자신을 기꺼이 내어드린 적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말씀에 순종하되 피 흘리기까지 순종하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는 선에서 머무르고, 멈추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우리내 삶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를 갈망할 만큼, 지치고, 힘들고, 어렵지도 않고, 오히려 이 세상의 것들과 화친하여 그것들을 즐기고 기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창세기 3장 1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옛 뱀, 곧 사탄과 원수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이 땅의 교회들은 원수 사탄의 공격 아래에서 고난과 역경과 박해와 도전 앞에 놓여 있습니다. 말씀을 따라 신실하게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이 분투가 반드시 따라옵니다. 그리고 이 분투 속에 성도들의 입술을 채워야 하는 고백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여야 합니다.
계시록의 마지막 문구이자 성경의 마지막 문구인 이 고백!
“마라타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바로 이 고백에 합당한 자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제목>
1. 세상의 것들을 누리다가, 정작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위로로 여기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2. 말씀에 신실하게 살아가는 자가 겪는 고난 중에, 예수님이 안겨다 주실 위로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3. [주보] 2024년 교회 표어인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