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08(목)
마가복음 3장 7-19절(신p.56)
염덕균 목사
<본문>
◎ 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8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9 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10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
1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12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
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16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17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18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19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해설>
예수님을 향한 바리새인과 유대 지도자들의 반감과 적대감은 점점 고조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특히 어제 살펴본 ‘안식일 관련 논쟁’은 바리새인과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일 마음을 먹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유대 지도자들의 모습과는 상반되게 수많은 군중들은 여전히 예수님께로 몰려왔습니다. 갈릴리를 비롯하여, 유대, 예루살렘, 이두매, 요단강 건너 동편 지역뿐만 아니라, 시돈과 두로 지역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의 반감과는 달리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을 지지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심지어 ‘귀신들’ 조차도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곳이면 예수님 앞에 엎드려 부르짖으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했습니다.
이러한 상황만 놓고 보자면, 예수님과 유대 지도자들 사이의 이 대결 구도에서 우위를 점하는 쪽은 예수님 쪽이었습니다. 비록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일 논의를 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은 유대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른 이방 지역에 이르기까지 펼쳐져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 세력’인 귀신들마저도 예수님 앞에 꼼짝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예수님 자신과 유대 지도자들 사이의 관계를 세력과 세력의 다툼, 힘과 힘의 대결로 이해하셨다면,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 나아가 귀신이 굴복하는 모습 등을 적절하게 이용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반대하는 유대 지도자들을 몰아내시고, 유대인들을 인도하는 새로운 지도자로 등극하실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마가복음이 보여주는 예수님의 모습은 무리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자 그들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셨습니다. 또한 귀신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때에 오히려 그들의 말을 막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몰려오는 무리들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시고, 귀신들의 증언을 막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실 하나님 나라는 세력과 세력 사이의 힘 싸움, 권력과 권력 사이의 투쟁으로 눌러 이겨서 세워지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행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 오늘 본문 13-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막 3:13-14) 몰려드는 무리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시고, 귀신들을 잠잠하게 만드신 이후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자들 ‘열둘’을 불러 세우시는 것이었습니다. ‘열둘’을 불러서 그들로 예수님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또 그들을 보내서 가르치게도 하시며, 심지어 예수님께서 행하시던 그 권능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일도 하게 만들려 하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이 ‘열둘’을 ‘제자’로 세워나가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불러 세우신 이 ‘열둘’은 앞에 모여들었던 ‘무리들’과 무엇이 다른 걸까요? 앞에 모여 들었던 수많은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바라보고 예수님께 몰려든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안겨다 줄 병고침과 귀신을 쫓아내 주실 것과 이런저런 회복을 기대하며 예수님께 찾아온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을 통해 세력을 규합하고, 지지를 얻을 생각이 전혀 없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시는 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그들로 예수님 곁에 머무르며 예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게 하셨습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모일 때 나오는 ‘세력’과 ‘규모’의 힘이 아니라, 예수님 곁에 머무르며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가르침’,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권능’을 기반으로 하여예수님께서 행하시던 일을 이어나가도록 하시기 위해서 열둘을 불러 모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시는 ‘하나님 나라’는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무언가’에 기대어 세워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시는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께로부터 나오는 ‘가르침’과 예수님께로부터 나오는 ‘권능’을 힘입어서 세워지는 나라입니다. 바로 그것을 ‘열둘’을 불러 모으셔서, 그들로 예수님과 함께 거하며 배우게 하시고, 예수님께 전해 받은 권능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던 그 일을 따라 행하도록 하심으로써 보여주고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이러한 원리는 지금 이 시대의 교회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감당하는 원리에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 된 이 땅의 교회들은 언제나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권능으로 교회를 향해 주어진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해 나가야 합니다. 교회가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사명은 출석 교인의 수, 재정 규모, 유명세 등에 기대어 이루어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예수님께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며, 예수님께로부터 공급 받으며 나아갈 때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교회가 가장 힘써야 하는 일 중 하나가 바로 ‘예배’입니다. 지난 주일 오전과 오후, 수요기도회를 통해서 반복해서 듣는 말씀과 동일하지요.
예배란 무엇입니까?
예배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복과 은혜로 우리를 채워나가는 시간입니다.
예배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죄 용서’의 은혜를 확인하고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예배란, 말씀의 주인이시자, 말씀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설교를 통해 받는 시간입니다.
예배란, 성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그리스도의 생명을 공급 받는 시간입니다.
예배란, 우리를 향한 동행의 약속과 함께 삼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 받은 것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파송 받는 자리입니다.
우리와 우리 교회는 우리 스스로를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채워나가고 있습니까?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가지고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공급해 주도록 이끌고 있습니까?
<기도제목>
1. 교회에 주어진 사명이, 세력, 규모, 힘, 숫자 놀음에 달려 있지 않음을 기억하며, 그러한 것들에 의지하려는 마음에 미혹 되지 않도록.
2. 교회의 능력이 예수님께로부터 ‘공급 받은 것’을 가지고, 함께 나누는 것에 있음을 기억하며, 삼위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자신을 가득 채워나가도록.
3. [주보] 우리 교회가 후원하고 협력하는 교회와 기관들이, 같은 신앙고백의 터 위에서서 복음 사역을 감당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