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30(토)
느헤미야 6장 15-19절(구p.734)
염덕균 목사
<본문>
◎ 15 성벽 역사가 오십이 일 만인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
16 우리의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크게 낙담하였으니 그들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17 또한 그 때에 유다의 귀족들이 여러 번 도비야에게 편지하였고 도비야의 편지도 그들에게 이르렀으니
18 도비야는 아라의 아들 스가냐의 사위가 되었고 도비야의 아들 여호하난도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므로 유다에서 그와 동맹한 자가 많음이라
19 그들이 도비야의 선행을 내 앞에 말하고 또 내 말도 그에게 전하매 도비야가 내게 편지하여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하였느니라
<해설>
오늘 본문은 성벽 공사가 마무리 되던 시점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외부의 방해와 위협, 내부의 갈등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벽 공사가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때 본문은 이 성벽 공사가 마무리 된 것에 대해 한 가지 사실을 알려주는데요. 16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느헤미야의 대적들과 주변의 다른 이방 족속들이 ‘이 사건’을 두고 두려워하고, 낙담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당연한 반응입니다. 산발랏과 도비야를 비롯하여, 수많은 대적들이 방해를 하고, 훼방을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예루살렘 성벽은 재건되고 말았습니다. 자신들의 수많은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는 모습을 바라보며, 실망감과 허탈함을 느꼈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지점은 그 뒤에 이어지는 구절입니다. 16절 하발절의 내용인데요. “그들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라”(느 6:16b) 성경은, 성벽 재건 공사가 마무리 되었을 때, 주변 대적들과 이방 족속들이 두려워하고 낙담했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진술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이어서, 그들이 그렇게 낙담하고 두려워한 원인을,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그들이 알았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지금 성경이 증거하는 바는, 느헤미야 개인이 느낀 감정이나 판단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성경이 증거하는 바는, 당시 대적들과 이방 족속들이 보인 반응의 근본적인 원인과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사건’,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 완성 된 것을 진실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두려워하고, 낙심하였습니다. 만약 이 일이 그저 느헤미야 개인의 지도력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라고 한다면, 이들이 이렇게까지 두려워하거나 낙담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저 사람의 힘과 능력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라고 한다면, 이후에라도 얼마든지 무너뜨릴 수 있는 일로 여겨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들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 느헤미야의 하나님에 의하여 이루어진 일로 여기며 두려워하고, 낙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들은 예루사렘 성벽이 재건 된 것을 느헤미야의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이해를 했던 것일까요? 어쩌면 그것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방해하기 위해서 그들이 행한 수많은 방해공작들 때문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어제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예루살렘 성벽 재건 공사를 방해하기 위해 그들이 행한 일들은 정말로 교묘하면서도, 집요했습니다. 특히나 주동자에 해당하는 느헤미야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2중, 3중으로 함정을 파 놓는 모습은 이들의 방해 공작이 얼마나 집요하게 이루어졌는지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가 이끄는 성벽 공사는 멈추지 않았고, 결국 완성에 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일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섬기는 하나님, 곧 느헤미야가 섬기는 그 신이 느헤미야와 그가 행하는 일을 지키고 보호해 주신 것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다고 여겨졌던 것입니다. 이에 그들은, 성벽 재건의 완공이 느헤미야의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성전 재건이 완성된 일을 두고서 두려워하며, 낙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내용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17절 말씀인데요. “또한 그 때에 유다의 귀족들이 여러 번 도비야에게 편지하였고 도비야의 편지도 그들에게 이르렀으니”(느 6:17) 17절 말씀은 성벽 공사가 마무리 된 상황, 나아가 주변 대적들과 이방 족속들이 그 일을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 여기며 두려워하며, 낙심하고 있는 그 상황에서도 유다 귀족들과 대적 도비야 사이에 내통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 사실을 말해주는데요. 첫째, 성벽 재건 공사가 마무리 된 상황에서도 유다 백성들, 특히 그 귀족들 사이에서는 느헤미야와 느헤미야를 통해 일하신 하나님을 인정하거나,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자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도비야를 비롯한 수많은 대적들이, 예루살렘 성벽 재건 공사가 느헤미야의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이라 것을 인정하고, 두려워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들은 느헤미야와 그의 하나님을 적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쉽게 빠지는 착각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하심’, ‘하나님의 존재하심’, ‘하나님의 행하심’과 같은 것들이 사람들의 눈앞에 확실하게 드러나고 증거되면, 사람들이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 편으로 나아오게 되리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증거하는 바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바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예루살렘 성읍이 완공되는 것을 하나님의 행하심이라 인정하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니, 하나님 백성들과 화칠을 맺거나, 그들을 대적하지 않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과 그 백성을 대적하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저 느헤미야 당시 사람들에게서만 나타나는 모습이 아닙니다. 이러한 모습은 창조 이래로 지금까지 언제나 있어왔던 모습입니다. 애굽의 바로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끝까지 억압하고 괴롭혔던 이유가, 애굽에 내려진 열 가지 재앙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까?(출 14:4) 라합이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숨겨 줄 때에, 나머지 여리고 성 사람들과 가나안 족속들이, 여전히 이스라엘을 대적했던 이유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일하심과 능력을 알지도, 들어본 적도 없었기 때문입니까?(수 2:11)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싸워서 승리한 이후에도, 아합과 이세벨이 엘리야를 제거하려 들었던 것은, 그들이 엘리야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입니까?(왕상 18:39) 아닙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존재하심, 하나님의 일하심,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경험했던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여전히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대적하는 편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의 일하심이 확실하고 분명하게 증거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증거하는 ‘인간’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증거하는 ‘죄인’의 모습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람을 ‘죄인’이라고 증거하는 것은, 그저 사람이 악행을 저지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경이 사람을 ‘죄인’이라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살아계심,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정하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형편과 상황 속에서도,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을 원하지 않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그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정도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우리가 서 있던 그 자리로부터 돌이켜, 하나님의 편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자리로 나아와,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붙들며,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사명을 행하며, 순종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느헤미야가 믿음의 사람인 이유는, 예루살렘 성읍이 폐허가 되어버린 상황을 바라보면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을 붙드는 가운데, ‘성벽 재건’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자신을 내어드리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반면에 느헤미야 당시 유다 귀족들이 불신의 사람, 배교의 사람인 이유는 느헤미야를 통해 성벽이 재건 된 모습을 보았고, 심지어 그 일이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편에 서지 않고, 대적들과 교제하고, 화친하며, 머뭇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우리는 어떤 자들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일하심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기꺼이 내어드리는 자들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믿고 인정한다고 말은 하지만, 실상은 여전히 세상의 것들이 우리에게 안겨다주는 만족과 기쁨과 즐거움을 좇으며 살아가는 자들입니까?
바라기는,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믿음의 사람’으로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말과 입술로는 하나님을 믿는다 말하지만, 실상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세우시는 그 자리에 우리 자신을 기꺼이 내어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주어지는 진정한 만족과 기쁨, 영광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제목]
1.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는 믿음으로 나아가도록.
2. [초등부] 어제부터 오늘까지 초등학교 6학년 친구들 모임이 진행 중입니다. 즐겁고 안전한 모임이 되도록.
3. [주보] 하나님과 풍성한 교제를 누리는 주일 공예배가 되게 하시고, 교우들과 성도의 교제가 활발한 주일을 보내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