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29(토)
로마서 9장 1-13절(신약p.251)
염덕균 목사
<본문>
◎ 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2 (1절에 포함됨)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6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10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해설>
로마서 8장에서
하나의 ‘정정’에 도달했던 바울 사도는
로마서 9장을 시작하면서
한 가지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원래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입니다.
바로 앞에서 바울 사도는
‘도무지 끊어낼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서
강하게 역설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주장과는
정 반대의 대비를 이루는 듯한 현실이
그들의 눈 앞에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약 이스라엘의 실패’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그토록 아끼시고 사랑하신다면,
나아가 하나님의 그 사랑이
도무지 끊을 수 없는 사랑이라고 한다면,
처음 하나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이스라엘은
결코 실패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어째서 이스라엘은 실패했고,
어째서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거부한 것입니까?
바로 이러한 질문과 의문에 대해
바울 사도는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3절 말씀입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롬 9:3)
바울 사도는 이 질문에 대답 하기에 앞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육체적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에 참여하는 것을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자기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절 본문에서는,
지금 바울 사도의 이 발언에 대한 진정성에
성령님께서 증인이 되어 주신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의 이러한 발언은
분명 그가 자기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
곧 유대인들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 지를
잘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어질 자신의 발언에 대한
일종의 ‘완충 효과’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이어질 내용들은
듣기에 따라서는
매우 냉정하고 차갑게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
유대 민족을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야기 합니다.
오늘 본문 4-5절 말씀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롬 9:4-5)
바울 사도는 이 구절을 통해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
자기 동족 유대인들이,
다른 이방 족속들과 비교해 볼 때,
분명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런 유리한 입지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 유대인들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수준에 도달하는 것을
실패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실패를 보여줍니까?
이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과 복음이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까?
하나님의 언약과 말씀이 패하여 짐을 보여줍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오늘 본문 6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롬 9:6-7)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아브라함의 혈통, 이스라엘의 혈통이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자격과 조건이라고 제시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밝히 드러내보여 주셨습니다.
동일하게 아브라함의 몸에서 태어났지만,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동일하게 이삭의 몸에서 태어났지만,
에서가 아니라 야곱을
유업을 이어갈 자로 세우셨습니다.
무엇이 이스마엘과 이삭을 나누는 기준이었습니까?
무엇이 에서와 야곱을 나누는 기준이었습니까?
오늘 본문 8절 말씀입니다.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롬 9:8)
그것은 아브라함의 혈통, 이삭의 혈통이라는
‘육체의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이 둘을 나누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이 둘을 나누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이 둘을 나누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한편으로 보면,
바울 사도의 이 발언은
앞에서부터 이어져 오던 논지를
자연스럽게 이어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약속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와 구원이라는
논지를 계속 이어 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매정하고 차가운 현실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바울 사도의 위 발언은,
마치 이스마엘과 에서에게는
애초에 하나님 백성으로 받아 들여질 만한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가 보여주려는 것은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구원의 조건과 이유를
사람으로부터 찾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과 믿음에
두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무런 개연성과 자격 없는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는 능력과 방법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동일한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언약과 율법과 예배와 약속을 받은 유대인들을,
친히 구원하기 원하시며,
능히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을 택하신 것,
에서가 아니라 야곱을 택하신 것,
이것은 하나님의 ‘차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차별’이 되려면,
‘장남’이기 때문에 ‘이스마엘’을 택하시고,
‘장남’이기 때문에 ‘에서’를 택하는 것이, 차별입니다.
허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과 맺으신 언약과
그 속에 이루어지는 주권을 따라
구원할 백성들을 부르셨습니다.
이는 ‘차별’이 아니라 ‘은혜’요,
‘매정함’이 아니라, ‘자비’요, ‘긍휼’입니다.
이 은혜가,
자격 없던 우리를
하나님 백성이라 부름 받게 해 주었습니다.
이 자비와 긍휼이,
혈통상 이스라엘 바깥에 있던 우리를
참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칭한 받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나타난,
이 은혜와 이 긍휼을 마음에 새기며,
오늘도 은혜에 빚진자, 긍휼을 덧 입은 자로서의
감사와 겸손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제목]
1.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자비로 부름 받은 인생임을 기억하며, 감사와 겸손, 너그러움을 나타내며 살아가도록.
2. [주보] 하나님과 풍성한 교제를 누리는 예배, 교우들 간에 믿음의 교제가 활발한 주일이 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