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10(금)
요한계시록 2장 18~29절(신p.400)
염덕균 목사
<본문>
◎ 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9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해설>
오늘은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 하나인 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말씀을 상고하도록 하겠습니다.
당시 두아디라 도시는 ‘아폴로’를 숭배하는 도시였습니다. 이때 이 ‘아폴로’는 ‘제우스의 아들’이었습니다. 즉 두아디라라고 하는 도시는 ‘제우스의 아들 아폴로’를 섬기는 도시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아디라 시에 거주하는 자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제우스의 아들 아폴로’ 숭배를 그만두고 ‘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섬긴다는 것을 의미하는 일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그 도시 전체가 섬기는 신을 섬기기를 그만둔다는 것은 그저 ‘종교 하나’ 바꾸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도시 전체가 섬기는 신앙을 거부하는 것은 도시 공동체 내에서 누릴 수 있는 지위와 특권과 기본적인 삶들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두아디라 교회 성도들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졌을 때, ‘제우스의 아들 아폴로’ 섬기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리로 나아왔습니다. 비록 그들의 삶에서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했지만, 그들은 ‘참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이 두아디라 교회 성도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도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내가 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19절). 그들이 보여준 믿음의 결단이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음을 예수님께서도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허나 안타깝게도 이 두아디라 교회 안에 그저 칭찬 받을 만한 모습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믿음과 사랑과 인내에 있어서 참으로 결단력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두아디라 교회였지만, 그들에게도 책망 받을 만한 점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20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그들 가운데 ‘이세벨’을 용납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세벨’은 사도 요한이 이 서신을 쓸 당시에 ‘이세벨’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선지자가 존재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세벨’은 북이스라엘의 일곱 번째 왕인 아합의 아내 ‘이세벨’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서신이 기록되기 약 900년 이상 전의 인물인 이세벨이 왜 언급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두아디라 교회가 빠진 잘못이 마치 아합과 이세벨이 통치하던 때의 북이스라엘의 모습과 유사하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 익숙하신 분들은 잘 아시는 것처럼 이세벨은 시돈 왕 엣 바알의 딸이었는데요. 이세벨의 고향 시돈은 바로 바알과 아세라 숭배의 원산지에 해당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이세벨이 북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내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이 이세벨이 그저 한 나라의 공주, 한 나라의 왕비 정도가 아니라 ‘자칭 선지자’라고 소개합니다(20절). 그녀는 매우 단호하고 호전적이며 심지어 매우 잔인한 인물이었습니다. 아합이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는 일을 두고 망설이고 있을 때에도 그녀는 거침 없이 그 땅을 빼앗습니다(왕상 21:7-14). 또 엘리야 선지자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소위 결투를 벌인 이후에 엘리야가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엘리야와 그의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보다 오히려 엘리야를 제거하려 듭니다(왕상 17). 이처럼 이세벨이 보여준 모습은 그저 한 나라의 공주와 왕비로서 조용하게 남편의 통치를 돕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통치에 개입하여 바알과 아세라 숭배를 권하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지점은 바로 이 이세벨의 통치가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느냐는 사실입니다. 이세벨의 통치가 일어나는 곳은 두로와 시돈 땅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의 한복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며,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드러내야 할 이스라엘 땅 한복판에서 놀랍게도 이세벨의 통치와 이세벨을 통한 바알과 아세라 숭배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두아디라 교회 안에 바로 이 ‘이세벨을 용납했다’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거짓된 사상과 가르침이 두아디라 교회 안에 매우 깊숙하게 침투해 들어왔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사실 교회 안에 거짓 가르침과 교훈들이 주어지는 것은 언제나 있었던 일들입니다. 이것은 신약 성경의 다양한 서신들을 통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내용이지요.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그냥 “너희가 거짓 교훈과 가르침에 빠졌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네가 이세벨을 용납하였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일까요?
그것은 두아디라 교회가 빠진 오류의 그 내용과 심각성이, 마치 이세벨이 통치하던 당시의 북이스라엘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즉 두아디라 교회가 빠져 있던 오류는 그저 기독교적 가르침 중에 몇 가지를 잘못 이해한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빠져 있던 오류는 도무지 복음의 진리라 말할 수 없는 것을 기독교적 진리라는 이름으로 가르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기독교’가 아닌 것을 ‘기독교’의 이름으로 가르치는 일이 교회의 한복판에 일어나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가르침이 어떻게 두아디라 교회 한복판에서 활개를 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우선 그 원인을 파악하기 전에 ‘기독교가 아닌 것’이 ‘기독교의 이름’으로 가르쳐 지는 것에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여러 번의 설교에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이러한 가르침은 비단 두아디라 교회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사실 이러한 모습은 지금 우리 시대 교회 안에서는 더욱 강력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가장 대표적인 형태가 ‘왕의 재정’, ‘긍정의 힘’ 등과 같은 소위 ‘번영 신학’이 그러한 가르침들입니다. 또한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기독교를 특정 정치적 이념과
규합하려는 시도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같이 ‘이세벨’을 교회 안에 용납하는 일입니다.
자, 그렇다면 교회의 한복판에서 이러한 잘못된 사상과 가르침들이 버젓이 ‘기독교’의 이름으로 가르쳐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하나는 그 거짓된 사상들이 우리의 그릇된 욕망과 너무나도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그릇된 욕망을 거룩한 명분과 더불어서 충족 받고 싶어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두 번째 이유는, 바로 그 그릇된 욕망에 규합하여 진리를 전하는 자들 또한
성도들을, 청중들을, 백성들을 이용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바른 진리를 전하며 고난과 역경의 상황 속에서도 함께 진리 안에 머무르려 하기보다 사람들의 그릇된 욕망과 사람들의 종교심을 이용하여 자신 또한 편하고 안정된 삶을 누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두아디라 교회가 처음부터 그런 교회는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들은 ‘제우스의 아들 아폴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 자신들의 지위와 권세, 권리들을
다 포기하고 내려놓고 나선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적 진리가 아닌 것이 마치 성경적 진리인 것처럼 가르쳐지면서, 어느새 그들의 한복판에서 성경과는 상관 없는 가르침들이 아무렇지 않게 선포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주어진 이 책망의 말씀으로부터 이 시대의 교회가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과연 우리 포항대흥교회는 이 책망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 있다고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제목>
1. 우리 안에 성경적 가르침으로 둔갑한 거짓 생각과 사상들이 있다면, 그것을 분별하며 거부할 수 있는 눈과 지혜를 주시도록.
2. 말씀의 사역자들이 진리를 바르게 전할 수 있도록. 지혜와 명철을 더하여 주시도록.
3. [주보] 직분자들이 맡은 직분 잘 감당하고, 구역 봉사자들에게 섬김과 사랑의 능력을 더하여 주시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