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23(월) 새벽기도
본문 - 사도행전 13:42-14:7
<본문>
42 저희가 나갈쌔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43 폐회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45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
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47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49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51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1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2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4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지라
5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6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7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본문 해설>
사도행전 4장 12절은 말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여러분, 우리 구원의 유일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른 이름과 길은 없습니다. 창세기부터 구약의 기록을 우리의 거울로 들여다 보면,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실패한 우리 죄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한마디로 사망이고 심판입니다.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말씀을 일점일획도 빠짐없이 지켜낼 수 있다면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에 보이는 일점일획 뿐만 아니라, 우리 중심의 모든 동기까지 하나님의 기준에 한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들어 맞는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연 누가 이 기준을 통과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할수록 드러나는 건, 우리들의 여지 없는 추하고 더러운 죄 뿐임을 절감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자기 죄를 이 말씀 앞에서 직면하고, 이 죄의 실상에 절감한 자들에게 가장 기쁘고 복된 소식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 안으로 부름 받은 죄인들의 유일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에 머무르는 길” 뿐입니다. 오직 구원의 길 되시는 “주께 붙어 있을 뿐”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들어온 이방인들에게 구약의 말씀을 설명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이들에게 바울과 바나바가 전한 복음은 충격이었습니다. 43절에 보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들은 자들은 구약 말씀을 잘 알았고 누구보다 율법 지키는 일에 힘을 쏟았습니다. 문제는 로마서 3장 28절의 말씀처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을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을 우리가 인정하노라” 라고 합니다.
바닷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만 더해지는 것을 알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끝없는 하나님의 기준을 감당해 내지 못하는 이상, 우리 스스로의 경건을 통해서 구원을 만들어 내는 길은 고달플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입문한 이방인들에게 바울과 바나바가 전한 복음은 해갈의 생수와 같았습니다. 인생의 해갈을 찾아서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고 있었던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 인생이 예수의 복음을 만나고 해갈함을 얻지 않았습니까!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전해졌을 때, 이 복음에 반응한 자들을 통해서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모입니다(44절).
그동안 유대인 회당에서 전해진 말씀은 분명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말씀입니다. 문제는 은혜로 주어진 그 모든 말씀과 약속이 언젠가부터 내편의 노력과 공로를 통해서 쥐고 흔들 수 있는 것으로 착각되기 시작합니다. 우리 역시 이런 경험을 하지 않습니까! 처음 부름 받은 은혜의 감격 뒤에 점점 신앙의 연수와 경험이 내 신앙과 구원의 은근한 자신감으로 자리 잡아 갈 때가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은혜는 복음 안으로 불러주실 때만 잠시 열고, 그 이후에는 닫아 놓을 수 있는 문이 아닙니다. 복음 안으로 부름 받은 우리는 한 순간도 은혜의 문을 닫아 둘 수 없습니다. 바울이 증거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고, 은혜의 복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은혜로만 삽니다.
돌아보면, 그리스도의 복음 안으로 은혜로 부름 받은 우리 삶에 왜 감사가 사라지고 기쁨이 사라집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은혜보다 내 열심이 앞서있고, 내 공로와 정성을 쏟는 일더 더 열중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없습니까? 우리의 열심과 헌신, 중요합니다. 문제는 내 편에서 시작된 열심과 헌신은 잠깐입니다. 결국은 헌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댓가를 바라고 나아가는 다른 종교의 정성을 앞세운 종교 행위와 별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과 내 열심과 정성만큼 결과과 보이지 않을 때 낙심하지 않습니까! 정성이 더 부족하다고 채찍질 하지 않습니까! 거기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기쁨과 감사가 없습니다. 결국 46절의 말씀처럼,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차저”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주의 은혜 안에서 흘러나오는 열심과 헌신은 기쁩니다. 지속됩니다. 하나님의 다함 없는 은혜가 그럴 수 없는 내 안에서 다함 없는 열심과 헌신을 불러 일으킵니다. 이 은혜의 복은이 우리를 담대함으로 이끌고 하나님의 구원을 향해 끝없이 나아가게 합니다. 이 은혜의 복음이 기쁨을 주고 찬송하게 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에게 한결 같이 권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우리를 은혜 가운데 머물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삶의 요소들은 없습니까? 은혜로 시작했던 기쁨과 자유는 온데 간데 없고, 기쁨을 상실한 채 의무와 형식만 남아 있지는 않습니까?
<기도하기>
1. 주님! 다시 이 은혜를 갑구합니다. 우리를 값없이 의롭다 하신 그 은혜로 나아갑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에 주신 복음이 무엇인지 그 은혜의 깊이를 다시금 깨닫게 하소서!
2. 성령님! 주의 말씀, 복음의 말씀을 들려 주시고, 성경을 열어 읽고 묵상할 때에 복음에 사로 잡혀 오직 은혜 안에 머물게 하소서! 다함 없이 베풀어 주신 복음의 능력 안에서 날마다 샘솟는 기쁨과 성령의 충만함으로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소서!
3. (주보 기도제목) 빛의 자녀로 빛의 열매를 맺어, 온 세상에 우리 주님의 빛을 비추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