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13(토) 새벽기도회
에스라 7장 27절~8장 14절(구p.720)
<본문>
◎ 7:27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그가 왕의 마음에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시고
28 또 나로 왕과 그의 보좌관들 앞과 왕의 권세 있는 모든 방백의 앞에서 은혜를 얻게 하셨도다 내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내 위에 있으므로 내가 힘을 얻어 이스라엘 중에 우두머리들을 모아 나와 함께 올라오게 하였노라
◎ 8:1 아닥사스다 왕이 왕위에 있을 때에 나와 함께 바벨론에서 올라온 족장들과 그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2 비느하스 자손 중에서는 게르솜이요 이다말 자손 중에서는 다니엘이요 다윗 자손 중에서는 핫두스요
3 스가냐 자손 곧 바로스 자손 중에서는 스가랴니 그와 함께 족보에 기록된 남자가 백오십 명이요
4 바핫모압 자손 중에서는 스라히야의 아들 엘여호에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이백 명이요
5 스가냐 자손 중에서는 야하시엘의 아들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삼백 명이요
6 아딘 자손 중에서는 요나단의 아들 에벳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오십 명이요
7 엘람 자손 중에서는 아달리야의 아들 여사야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칠십 명이요
8 스바댜 자손 중에서는 미가엘의 아들 스바댜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팔십 명이요
9 요압 자손 중에서는 여히엘의 아들 오바댜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이백십팔 명이요
10 슬로밋 자손 중에서는 요시뱌의 아들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백육십 명이요
11 베배 자손 중에서는 베배의 아들 스가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이십팔 명이요
12 아스갓 자손 중에서는 학가단의 아들 요하난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백십 명이요
13 아도니감 자손 중에 나중된 자의 이름은 엘리벨렛과 여우엘과 스마야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육십 명이요
14 비그왜 자손 중에서는 우대와 사붓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칠십 명이었느니라
<해설>
어제 본문에서 우리는 ‘아닥사스다의 조서’의 내용과 성경이 이 조서에 대해 기록한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바사 제국 왕 아닥사스다가 내린 조서의 내용은 분명 에스라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호의적인 내용들이었습니다. 하나님 백성들이 고국으로 돌아가 예루살렘 도시와 성전을 회복하는 일에 도움이 될만한 내용들이 매우 세세하고 구체적인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바라보자면 그들 앞에 펼쳐진 현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일컬어지는 자신들은 여전히 ‘바사’라고 하는 대제국의 다스림 아래에 놓여 있었고 아닥사스다 왕의 허락과 도움 없이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성전을 건축할 수도 없는 것이 그들이 처한 현실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바사’라고 하는 제국을 물리치시고,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이 ‘온 세상’을 지배하는 제국이 되도록 만들어 주시지 않았던 것일까요? 어째서 하나님은 ‘바사 왕 아닥사스다’의 허락과 도움을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건축하도록 만드신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가지고 계시는 계획이 ‘건물로서의 성전’, ‘도시로서의 예루살렘’, ‘고국으로서의 유다와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원하신 것은 눈앞에 놓인 어렵고 힘든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증거들을 따라 하나님을 향한 신뢰 가운데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 ‘성전의 회복’이라는 목표와 목적을 이루는 것에 우리의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바라보며 하나님과 동행을 이루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바로 이 ‘아닥사스다가 내린 조서’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조서의 내용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과 인도하심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제한적이고, 부족해 보이는 방법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방법을 통해서도 당신께서 온 세상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눈에 보이는 목표’, ‘눈에 보이는 목적’에 우리의 마음과 초점을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목표와 목적이 없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닥사스다를 통해 ‘조서’를 내리시고 에스라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해 주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 목적에 대해 오늘 우리가 읽은 27-28절 말씀이 이렇게 말해주고 있는데요.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그가 왕의 마음에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시고 또 나로 왕과 그의 보좌관들 앞과 왕의 권세 있는 모든 방백의 앞에서 은혜를 얻게 하셨도다”(라 7:27-28a)
하나님께서 에스라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받게 하신 이유,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를 송축’하며 ‘여호와의 성전을 아름답게’ 하도록 만드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때 이 ‘성전을 아름답게 한다’라는 말은 단순히 성전을 다시 건축하고 화려하게 꾸민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때 ‘아름답게 하다’라는 말은 ‘영화롭게 하다’라는 의미인데요.
운동 선수가 영화롭게 되는 것은 자신이 속한 분야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잘 감당하므로 그에 합당한 성취와 업적을 남겼을 때 그것에 돌리는 인정과 칭찬을 의미합니다. 즉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가‘영화롭게 하다’, ‘영화롭게 된다’라는 것은 부여된 역할과 기능을 충실하게 감당할 때에 그 대상에게 돌려지는 존귀와 칭찬, 인정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성전을 영화롭게 한다’라는 말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까? 그것은 성전이 성전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감당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전의 기능과 역할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성전의 영화로움은 성전 외벽의 크기, 성전 재료의 고귀함, 성전 장식의 화려함 등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의 영화로움은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를 얼마나 진실하고 순수하게 경험하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에스라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해 주신 이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내려 주시고 그들이 갈 길을 지켜 주셨던 것입니다. 단순히 ‘건물로서의 성전’, ‘고국으로의 귀환’, ‘포로 생활의 종결’이 그 목적이 아니라, ‘성전을 영화롭게’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아야 할 것은 ‘국가로서의 이스라엘’,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 ‘건물로서의 성전’, ‘포로 생활 종결로서의 예루살렘 귀환’이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회복해야 할 자리는 ‘성전이 성전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는’ 하나님을 예배 하는 백성으로서의 회복,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백성으로서의 회복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지금 이 시대의 교회들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겠지요? 이 시대 교회의 존재 이유와 목표와 목적은 교회 건물의 화려함, 교인들의 숫자, 교회의 재정적인 규모가 아닙니다.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목표와 목적은 안정되고 부요한 삶, 건강의 회복, 자녀들의 진학과 취업 등이 아닙니다.
이 시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본질적인 목표와 목적은 교회가 예배하는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온전하고 바르게 회복하는 것이고, 성도 개개인이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누리며 하나님 자녀와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온전히 누리고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가장 고귀하고 아름 다운 것은 포로로부터의 해방도, 크고 화려한 성전 건물, 교회 건물도, 경제적인 자유도, 건강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선물은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누리는 권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예배’를 통해 경험하고 누리는 것입니다.
<기도제목>
1. 하나님이 주신 ‘선물들’에 마음을 빼앗겨서, ‘하나님’이라는 선물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2. ‘예배’를 통해 주신 특권과 선물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풍성히 누리는 우리 되도록.
3. [주보 기도제목] 영광스러운 약속을 붙잡게 하셔서, 진리의 영으로 예배하는 주일 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