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3월 21일(화)
본문: 누가복음 19:28-44
<본문>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33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37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본문 해설>
함께 읽은 본문의 내용은 예루살렘 입성입니다.
감람산에서 내려오시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메시야이시며, 나귀를 타시는 겸손한 왕이심으로 스스로 나타내셨습니다(스 9:9).
오늘 새벽에는 본문의 후반부인 41절-44절을 중심으로
예루살렘 성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오자,
제자들은 당장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11절).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오늘 본문 41절입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여정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9장 51절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오늘 본문은 긴 여행 길의 도착점입니다.
하지만 그 결말은 더욱 긴장을 일으킵니다.
이제 이 성에 가까이 오시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셨습니다.
반면에 대중들은 또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고 있습니다.
모든 상황이 아이러니(역설)로 가득차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하나님의 성’이라 불리는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찾아오신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온 성은 예수님을 왕으로 받지 않는 원수입니다(19:20).
지금은 열렬한 환영을 내보이는 대중들조차
곧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원하는 메시야가 아닌 것을 발견하고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외칠 것입니다(23:21).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예루살렘은
언약적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않는 황폐함입니다(44절).
언약의 복은 더 이상 땅 위 예루살렘에 남아있지 않을 것입니다.
언약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문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언약의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이제 땅의 예루살렘이 아닌,
‘하늘의 예루살렘’이신 오직 그리스도를 좇아가야 합니다(히 13:13-14).
오늘 본문 35-37절을 보시면,
예수님은 스가랴의 말씀을 성취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왕으로서 예루살렘으로 나아가십니다.
스가랴 9:9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 지어다 에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화답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38절)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꿰뚫고 있으십니다.
그들은 환영은 얼마 후에 비난과 채찍으로 바뀔 것입니다.
다만 주께서는 그들의 환영을 예언을 이루시는데에 사용하실 뿐입니다.
환영하는 사람들의 기대와 생각과는 달리,
예수님은 당장에 정치적 왕이나, 권세를 부리실 자로 입성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이 성에서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구원의 사역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성과 그 중심에 있는 성전은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이며,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나타내는 곳입니다.
그 중심에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 예배하는 곳입니다.
이제 때가 차매,
하나님의 임재, 통치, 예배의 실체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예루살렘 성은 자기가 보기에 옳은 길로 가고 있습니다.
옛 것, 곧 성전 제사와 제사장 교직과 여러 체계들을
자기 욕심을 따라서 잘못 붙잡고서, 하나님을 섬기노라 떠듭니다.
실상은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고, 알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없습니다(눅 20:15-16).
예루살렘에 관련된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성과 이스라엘은
오히려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합니다.
복된 이스라엘 민족과 예루살렘 성에 남은 것은 심판 뿐입니다.
43-44절입니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언약적 심판이며, 철저한 황폐함입니다.
주후 70년에 이뤄지는 예루살렘 성과 성전 파괴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거절하는 성에 대한 언약적 저주와 멸망입니다.
오늘 우리가 조금더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41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우셨다는 말씀입니다.
41절입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예수님께서 언약적 저주와 심판을 내리시면서 우셨습니다.
슬픔과 애통입니다.
저주의 선언은 동시에 돌이키라는 회개 요청입니다.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시며, 회개를 요청하고 있으신 것입니다.
저주의 날이 오기 전에,
참된 평화와 보살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이켜야 합니다.
‘저주는 회개요청이다’고 하여, 저주가 단순한 위협만은 아닙니다.
실제로 일어날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 슬퍼하셨습니다.
고통과 비극의 날이 다가올 것입니다.
심판은 실제적인 아픔을 가져올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실제를 아시며, 눈물 흘리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주께서 하신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더이상 땅의 예루살렘에 머물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예루살렘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이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과 교제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제사가 단번에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안에서 예배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걸어가셨다면,
우리는 모든 일을 이루어주신 새예루살렘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과 위로가 되시는 새 예루살렘이십니다.
둘째로,
우리는 저주와 심판의 길로 나아가는 자들을 향한 애통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실제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저주와 황폐함은 반드시 이루집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했던 것과 같이, 더욱 분명하게
그리스도를 나아오지 않고, 붙잡지 않는 자들에게
영원한 저주와 멸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와 같이, 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애통함으로 심판으로 나아가는 자들에게 경고해야 합니다.
회개하도록 요청해야 합니다.
주께로 돌이키라 하며, 이 교회 초청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하루도,
새 예루살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찾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심판으로 나아가는 죄인을 향해 애통하며,
주께로 나아가도록 그들을 부르는 우리가 되길을 바랍니다. 아멘.
<기도제목>
1.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누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애통하며, 죄인들을 주께로 부르는 일을 감당하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2.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신실하고 서로의 유익을 구하고 서로 하나되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