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23(토)
잠언 24장 13~22절(구p.938)
염덕균 목사
<본문>
◎ 13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
14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이것을 얻으면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15 악한 자여 의인의 집을 엿보지 말며 그가 쉬는 처소를 헐지 말지니라
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17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18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19 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20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21 내 아들아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와 더불어 사귀지 말라
22 대저 그들의 재앙은 속히 임하리니 그 둘의 멸망을 누가 알랴
<해설>
오늘 본문은 ‘지혜가 우리 영혼의 송이꿀과 같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지혜가 영혼의 꿀과 같다는 말은 그것이 ‘달기만’ 할뿐 아니라, 그것이 ‘유익하다’라는 말도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송이꿀과 같은 ‘지혜’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야기해주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잠언 말씀을 살피는 가운데 잠언에서 말하는 ‘지혜’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잠언이 말하는 지혜의 핵심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며, 하나님께서 공의롭고 정의롭게 역사하고 계심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삶의 태도! 바로 이것이 잠언이 말하는 지혜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이 ‘지혜’를 가진 자는 어떠한 태도로 살아갑니까? 이에 대해 17절 말씀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는데요.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17절) 어제 본문에서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악인과 함께 하지 말라”라고 했었는데(1절), 오늘 본문은 ‘원수가 넘어지는 것을 즐거워하지 말라’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왜 같은 잠언 말씀에서 서로 상반되는 듯한 권면을 하는 것일까요? 나아가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선 가장 단순한 이해는 1절에서 말하는 ‘악인’과 17절에서 말하는 ‘원수’를 동일한 부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악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나의 ‘원수’가 아닐 수 있고, 또 ‘나에게는’ 원수 같은 자라 하더라도 그가 반드시 ‘악인’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1절과 17절 말씀은 서로 관련 없는 별개의 교훈과 권면을 주는 말씀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겠지요.
다만 잠언에서는 ‘악인’과 ‘원수’를 ‘동일한 부류’로 표현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따라서 ‘원수’와 ‘악인’을 따로 구별해서 이해하기보다는 ‘참 지혜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자들’이라는 동일한 부류의 사람들로 보아도 크게 문제가 없을 거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상반되어 보이는 두 권면에서다시 한번 우리의 악한 본성과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는 한편으로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면서, 혹 나에게 그 ‘형통함’이 주어진다면, 언제라도 악인의 자리에 설 준비가 되어 있는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악인과 손을 잡고, 우리 스스로의 악행을 정당화하며, 악인과 함께 형통을 누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어제 우리가 살펴본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누군가 스스로의 악행으로 인해 넘어짐과 엎드려짐, 소위 ‘실패’와 ‘좌절’을 맞닥뜨리는 모습을 보면 언제라도 그로부터 돌아서서 비난하고 비판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마치 자신이 그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한 적이 없는 것처럼, 그 악인과 화친한 적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악인과 처음부터 원수였던 것처럼, 돌아서서 그를 비난하고 비방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원수가 패망한 모습’을 보며 그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타인의 실패에서 나의 기쁨을 찾고, 타인의 불행에서 나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의 동기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합니다. 망할 만한 자들이 망한 것이고, 실패할 만한 자들이 실패한 것이고, 넘어질 만한 자들이 넘어진 것이니 원수의 넘어짐과 엎드려짐에 대해 속 시원하게 느껴도 괜찮다고 여깁니다. 바로 이것이 죄인 된 우리의 또 다른 본성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을 향해 잠언 말씀은 우리가 기뻐해야 할 것은 ‘악인의 패망’, ‘원수의 넘어짐’ 그 자체가 아니라 말씀하십니다. 소위 ‘다른 이들의 불행’이 우리 기쁨의 ‘이유와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뻐해야 할까요? 무엇이 우리의 기쁨이 될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0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
예수님의 파송을 받아서 복음을 전하러 나갔던 제자들은 귀신들이 항복하는 모습을 보며 격양된 모습으로 예수님께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께서는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여러 가지 권능을 행하며, 그 가운데 귀신들조차 굴복하는 모습에 흥분하고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진짜 기뻐해야 할 일은,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 곧 그들이 하늘 아버지께 속한 자들임이 확인되었다는 사실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원수의 넘어짐을 기뻐하지 않을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마음의 자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에게 속한 자인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을 때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다가 악인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늘에 속한 자임을 기억하며 악인의 자리를 멀리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원수가 넘어지는 모습을 보며 속 시원해 하고, 통쾌해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원수’ 마저도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다.
본디 우리의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와 긍휼로 구원하시고, 자녀 삼으신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께 우리가 속해 있음을 깨달을 때 우리 또한 우리를 품으시고 소유하신 바로 그분의 모습을 따라 원수를 긍휼히 여기며,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대흥의 성도 여러분, 우리는 누구에게 속한 자들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자임을 기억하며, 악인과 원수의 형통을 부러워말고, 오직 의와 선을 행하는 우리가 됩시다. 나아가 악인과 원수 또한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올 수 있도록 기도하며 손 내밀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제목>
1.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자임을 기억하며,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마음으로, 원수 또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 주시도록.
2. [주보] 주일을 온전한 예배의 날로 사모하며 지키고, 주일 교육과 교제에 은혜를 더하시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