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22(금) 새벽기도회
잠언 24장 1~12절(구p.937)
염덕균 목사
<본문>
◎ 1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2 그들의 마음은 강포를 품고 그들의 입술은 재앙을 말함이니라
3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되며
4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
5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
6 너는 전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지략이 많음에 있느니라
7 지혜는 너무 높아서 미련한 자가 미치지 못할 것이므로 그는 성문에서 입을 열지 못하느니라
8 악행하기를 꾀하는 자를 일컬어 사악한 자라 하느니라
9 미련한 자의 생각은 죄요 거만한 자는 사람에게 미움을 받느니라
10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이 미약함을 보임이니라
11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 주며 살륙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12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
<해설>
오늘 본문은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라는 권면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이 두 가지가 있는데요. 우선 첫 번째는 ‘악인이 형통할 수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형통’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쉽게 말해서 ‘잘되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부, 명예, 권세, 인기, 건강 등을 소유하며, 이 땅에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사는 것, 바로 이것이 ‘형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잠언 말씀은 ‘악인이 형통한 상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악인에게는 그 악행에 합당한 고난과 형벌이 주어져야 하고, 상대적으로 선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형통과 행복이 주어지길 기대합니다. 그래야 공정하고 공평한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막상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 당하는 경우가 훨씬 더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간사하고, 간교하고, 악랄할수록 더욱 형통해지는 경우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마주하는 가운데 사람들은 크게 낙심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두 번째 사실’로 이어지는데요. 그것은 바로 ‘악인의 형통’을 사람들이 ‘부러워’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악인의 악행’에 대해서 말로 욕을 하면서도 ‘악인의 형통’은 속으로 부러워합니다. 나아가 혹 그러한 형통이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악인’이 될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며, 악인과 가까이 지내며, 어느새 자신도 악인이 되어 악인들이 누리던 그 형통을 함께 누리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악인의 악행’을 미워하면서도 ‘악인의 형통’이 주어질 기회가 생기면 스스로 ‘악인의 자리’로 나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 번째는, 이 땅에서의 ‘형통’을 최우선적인 가치로 여기기 때문일 겁니다. 부와 명성과 권세와 건강 등을 소유하는 것이, 의롭고, 선하고, 덕스러운 삶보다 더 분명하게 손에 잡히는 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두 번째 이유는, 사람은 본성적으로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악행을 통해 누리는 형통에 대해서는 그들의 ‘악행’에 초점을 맞추어 비난하지만, 자신이 악행을 통해 누리는 형통에 대해서는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행한 일을 ‘선하다, 의롭다’ 말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로 악한 일은 아니다’, ‘정황상 어쩔 수가 없었다’, ‘다른 누군가가 행하는 짓에 비하면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식으로 스스로의 악행을 통해 누리는 형통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합니다.
그런데 결국 이러한 태도의 근본적인 원인은 그들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감찰하심과 공의로운 심판을 믿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잠언 말씀은 바로 이러한 자들을 향해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들,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하나하나를 살피고 감찰하고 계심을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할 뿐 아니라, 스스로 악인의 자리에서 서서 ‘악행’을 통해 ‘형통’을 쟁취하려 듭니다.
바로 이러한 자들을 향해 오늘 본문 12절 말씀은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잠 24:12)
지금 읽은 12절 말씀은 ‘악행을 저지른 것’에 대해서 지적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12절 말씀이 지적하는 바는 곤경에 처한 자를 도와주지 않고 모르는척 한 자를 향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12절이 경고하는 말씀은 ‘악행을 저지른 것’에 대한 경고가 아니라, ‘선을 행하지 않은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이때 12절 말씀은 무엇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까? “마음을 저울질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행해야 할 선행을 행하지 않은 자들에 대해서도 반드시 ‘보응’하시는 분이심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악행’을 통해 누리는 ‘형통’에 대해 하나님께서 그에 합당한 보응을 내리지 않으시겠습니까?
악인들이 악행을 일삼는 이유는 우리의 행위를 공의롭게 보응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신 법칙인 의롭고 선한 삶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 당장 나를 이롭게 한다고 여겨지는 것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참 지혜를 따르고 구하는 삶은 당장 내 눈에, 마음에 좋아 보이는 것을 찾고 구하려 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악인들의 꾀를 따르며 그들의 형통을 부러워하고 그것을 좇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삶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으며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사모하여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고 즐거이 순종하는 삶입니다. 형제의 곤궁함과 곤란함을 모르는 채하고 넘어가지 않고 기꺼이 손 내밀어 섬기는 삶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는 자들입니까? 악인들이 누리는 형통에 참여치 못하여 빈궁하고 초라한 삶을 살게 될 것이 두렵습니까? 그 불안과 초조를 견디지 못하여 하나님을 모르는 악인들과 동일한 것을 붙좇고 따라가는 자들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모든 것을 살피시며 우리의 모든 행위를 따라 보응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롭고 선한 길을 걸어가려 하고 있습니까?
잠언이 말하는 참 지혜인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하나님 나라의 자녀와 백성으로서 선하고 의로운 일들을 행하는 우리,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자들인 것을 드러내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기도제목>
1. 참 지혜인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통해, 우리가 누구에게 속한 자들인지를 잘 드러내도록.
2. [주보] 재해로 인해 고통 중에 있는 모로코/리비아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그 지역 교회의 성도들을 안전하게 지켜주시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