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08(화)
히브리서 5장 11절-6장 12절(신p.356)
염덕균 목사
<본문>
◎ 5: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 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10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해설>
히브리서 말씀은 구약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가르치는 ‘설교’ 말씀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이 설교 말씀은 선포와 권고, 그리고 경고가 교차하여 반복되고 있는데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바로 ‘경고’의 말씀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저자가 당시 성도들을 향하여 하는 경고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12절 말씀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그들이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의 모습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히 5:12).
히브리서 저자는 그들에게 전해진 복음의 내용들, 그들이 복음을 배우고 알 수 있었던 시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준 자들의 수고 등을 생각할 때에, 그들이 마땅히 ‘선생이 되어 있어야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때 ‘선생이 된다’라는 것은 전문적으로 누군가를 가르치는 특정 직분이나 직업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복음의 기본적인 내용에 관해서는 다른 이들에게 말해 줄 수 있는 수준과 내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이 히브리서를 받던 성도들은 ‘선생’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유아’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다른 이들을 가르치기는커녕, 오히려 다른 이들로부터 다시 말씀의 초보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입니까? 이에 대해 11절 말씀은 그들의 “듣는 것이 둔하”였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듣기에 둔하다’라는 말은 그들의 청력이 떨어졌다거나, 혹은 지적인 능력이나 수준이 부족함을 지적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둔하다’라는 단어는 ‘게으르다’, ‘지체한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표현입니다. 즉, 이들이 말씀의 초보에 머물러 있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듣는 일에 아둔하고 게을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지적하는 바는 결국 말씀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그들이 보이는 성향과 태도를 보여줍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이야기만 듣고 싶어 했을 뿐,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완성 된, 복음의 부요한 내용들에 대해서 그다지 듣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자신들의 종교심을 자극해 주고, 그들이 현재 행하고 있는 종교적 의식과 행위들에 대해 인정해 주고 지지해 주는 몇 마디 말이었을 뿐,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큰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에게 안겨다주신 복음의 그 놀랍고 위대하고 풍성한 내용들에 대해 그다지 듣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소위 명분상 신앙인으로 보낸 세월은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지식과 이해의 수준은 선생이 되기는커녕, 젖먹이 어린 아이에 불과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스스로의 위치와 수준을 인정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복음의 기초부터 배우고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보이느냐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태반입니다. 이들은 자기 스스로 유아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을 포함한 다른 교인들 역시도 자신들의 수준에 머물러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이러한 자들이 드러내놓고 ‘내 수준이 모자라니, 당신들도 모자란 수준에 머물러 있으시오!’라는 식으로 말은 하지 않지요. 하지만 조금 어려운 내용, 조금 복잡한 내용, 조금 신학적인 내용이 설교나 교회 내 교육 시간에 나올라 치면, 이들은 그러한 가르침들에 대해 비판과 비난을 쏟아냅니다.
“그런 거 없이도 신앙생활 잘 해왔다!”, “예수 믿고 천국 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지, 뭐 저리 복잡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드느냐?”, “거, 괜한 유난들 떨지 말고, 기도 열심히 하고, 헌금 잘 하고, 찬양 크게 부르면 하나님께 복 받는다!” 이런 식으로 말들을 하면서, 교회가 말씀 안에서 자라나가는 것을 방해하고 훼방 놓습니다.
그리고 더 심각한 것은 이러한 자들은 애초에 말씀을 듣고 배우는 자리에 나오려고 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혹여 말씀을 듣는 자리에 몸은 나와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귀와 마음은 닫혀 있습니다.
이 시대의 많은 성도들이 소위 ‘나눔’이라는 것을 할 줄 모릅니다. 바로 ‘말씀 나눔’이라는 것을 할 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교회 내에서 ‘나눔’ 시간을 가지면 한 주간 어떻게 살았고, 이런저런 어려움들이 있었고, 이런저런 기도제목이 있었다가 이들이 나누는 내용의 전부입니다.
정작 이들에게 그들이 ‘들은 바’, 특별히 ‘예배 시간’을 통해 주어진 그 ‘설교 말씀’을 들은 바를 가지고 이야기 하는 모습이 없습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의 나눔에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각자가 경험한 사건 사고가 다르고, 시간 대가 다르고, 등장인물은 다르지만, 정작 믿음의 성장과 성숙을 보일만한 내용의 변화를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신앙의 언어가 너무나도 빈곤합니다. 결국 이 모든 원인은 그들이 ‘듣는 일에 둔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듣는 일’에 익숙한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실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는’ 자들입니까? 우리가 귀와 마음을 기울여 들은 그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자라게 하며, 하나님 앞에 서도록 만들어 주고 있습니까? 한달 전보다, 1년 전보다, 5년, 10년 전보다 우리의 신앙의 언어와 사유는 얼마나 더 깊어지고 부요해 졌습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만약 이제껏 우리의 태도가 ‘듣는 일에 둔한’ 자들이었다면 이제라도 돌이켜 말씀 앞에 자신을 세울 수 있는 우리들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언제까지나 영적인 유아, 젖먹이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가는 저와 우리 대흥교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제목>
1. 말씀을 듣는 일에 둔하지 말고, 듣고 배우고 알아가며, 자라가는 일에 힘쓰는 올 한해 되도록.
2. [주보] 전국 어린이 대회에 참여하는 자녀들과 교사들의 걸음을 지켜주시도록.
오늘부터 시작 되는 SFC겨울수련회와 참여하는 중고등부 학생들을 위해.
3. [차드] 기독교 교사 교육 / 강의를 진행하는 김용규 목사님 / 활동을 준비하는 청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