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24(수)
히브리서 11장 4-22절(신p.365)
염덕균 목사
<본문>
◎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해설>
어제 살펴보았듯이
히브리서 11장 말씀은
‘믿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사실을
정의 내리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가 말하는 ‘믿음’,
나아가 성경이 말하는 ‘믿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이
반드시 주어지리라는 확신과 신뢰 가운데
현재를 ‘인내’하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들은
바로 ‘그 믿음’을 지닌 자로 살았던
우리 믿음의 선진들의 모습을
나열하여 보여주고 있는데요.
오늘 우리가 읽은 4-22절까지의 말씀은
아벨에서부터 요셉에 이르기까지
‘창세기 전체’에 걸쳐서 나타나는
믿음의 조상들, 믿음의 족장들의 삶에 대해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믿음의 인물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은데요.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그리고 마지막 요셉입니다.
창세기에 익숙하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이들 각자가 속해있던
구체적인 상황과 형편들은
조금씩 차이가 있었습니다.
아벨의 경우,
그의 부모 아담과 하와가
에덴으로부터 쫓겨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그 타락의 결과로 말미암은
여러 고통이 막 시작 되던 시점이었습니다.
에녹의 경우,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 곧 ‘구원자’에 대한
간절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족보에 반복해서 이어지는
‘죽음의 그림자’를 목도하던 상황이었습니다.
노아의 경우,
악이 세상에 관영하고,
그와 그의 아들들을 제외한
그 어떤 자들도 지지해 주지 않던 그 때에
홀로 외롭게 방주 만드는 작업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바벨 사건을 지나면서
하나님께서 언어와 민족을 흩으시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나라와 민족을 세우며
자신들만의 터와 입지를 견고히 하던 때에,
오히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경우,
주변의 다른 친족들이
수많은 자녀와 자손을 두던 그 때에
아이를 가지지 못하던 몸으로
이미 수십년의 세월을 보낸 이후 였습니다.
이처럼 창세기 조상들이 처해 있었던 형편들은
저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모습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는데요.
그것은 이들이 처해있던 상황들만 놓고 보자면,
이들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지키는 일에
‘도움이 될 만한’ 상황들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도움이 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부인하고
그들 주변에 있었던 다른 자들과 같이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더 합당한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사실이
이들로부터 또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하도록 만들어주는데요.
그것은 이러한 형편 속에서도
그들은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자신들에게 주어진 믿음의 여정을
계속해서 걸어갔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이들이 속한 형편은
하나같이 그들이 믿음을 따라 걷는 그 길을
결코 지지해 주지 않는 상황들이었습니다.
아니, 지지해 주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걸어가고자 하는 그 길을
방해하고, 훼방 놓고, 부정하는 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믿음의 자리를
결단코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들은
하나같이 그 믿음의 자리를
끝까지 고수하며 지낼 수 있었던 것일까요?
이에 대해 히브리서 말씀은
13-14절에서 이렇게 말하는데요.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히 11:13-14)
히브리서 말씀은
우리 창세기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에 대해
두 가지 사실을 말해주는데요.
첫째, 그들이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을 멀리서 보고 환영했다’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약속을 받지 못했다’라는 말은
‘약속 자체’를 받지 못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실체가
그들이 살아 있던 당대에는
온전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너의 후손이 별과 같이 많게 하리라”라고
약속해 주셨었지만,
실제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자녀는
‘이삭’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은
수백만, 수천만, 수억 명의 사람들이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또한
바로 ‘믿음’ 안에서 ‘약속의 자녀’로서
‘아브라함’을 우리 믿음의 조상으로 여기며
그의 후손의 반열에 서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아브라함은
그가 살아 있던 당시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
‘그 실체’는 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지요.
하지만 그는 멀리서
바로 그 ‘약속의 실체’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환영’하였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고,
또한 동시에 다른 믿음의 선진들이 보여준
믿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자연스럽게 두 번째 특징으로 이어지는데요.
그것은 바로 그들이
이 땅을 그들의 ‘본향’으로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를 이 땅에서의
나그네와 이방인으로 여기며
살아갔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이 땅을 자신들의 본향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이 땅에서의 삶을 잘 누리는 것을
자신들의 삶을 평가하는 기준과 목표로
설정해 두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서의 만족과 기쁨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가운데,
그것을 바라며 소망하는 삶을
더 큰 기쁨과 즐거움으로 여기며 살아갔습니다.
땅 위에서 누리는 만족보다,
진정한 ‘상 주시는 이’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현재의 고난과 어려움을
견디며 지냈던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정체성을
이 땅에서의 ‘이방인과 나그네’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 고백 아래에서
이 땅에서의 즐거움들을
마땅히 ‘다 누려야 할 것’으로 여기지 않고,
인내하며 절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까?
그것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구별시켜 주고 있습니까?
<기도제목>
1. 우리가 이 땅에서 이방인과 나그네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에 합당한 삶의 태도와 자세를 갖추도록.
2. 예배의 자리에서, 바로 이 정체성을 확인하고 훈련하며,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더 나은 본향’을 바라 보는 우리가 되도록.
3. [주보] 마음과 육신의 어려움으로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을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시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