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30(목) 새벽기도회
사도행전 28장 23-31절(신p.238)
<본문>
◎ 23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24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29 (없음)
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해설>
오늘은 사도행전 맨 마지막 내용입니다. 동시에 바울 사도의 사역 맨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사도행전의 맨 마지막 모습, 바울 사도의 맨 마지막 행적은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너무 초라합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초반의 모습과 비교해 보면 더욱 뚜렷하게 느껴지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사도행전과 초대 교회의 모습은 사도행전 1~5장 사이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오순절날 성령님께서 강권적으로 강림하시고, 사도들을 통해 표적과 기적, 치유 등과 같은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나고, 한번 설교를 하면 수십명, 수백명, 수천명이 복음을 듣고 돌이키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사도행전의 모습, 초대 교회의 모습은 굉장히 역동적이고, 생명력이 넘치는 모습입니다.
그에 비해 오늘 본문이 기록하고 있는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면, 바울 사도의 마지막 사역 장면은 너무나도 밋밋하고 초라합니다. 그 밋밋하고 초라한 장면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절이 24절 말씀 같은데요.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아무도 믿지 않더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었더라면 ‘그런 저항과 거부가 많은 곳에서도 바울 사도가 담대히 복음을 전했구나’ 이렇게라도 생각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누구는 믿고, 누구는 믿지 않더라’라는 식의 이런 애매모호한 표현은 이 기사를 읽는 청중들로 하여금 더 맥이 풀리게 만드는 기분입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은 바울 사도가 감금 된 상태로부터 풀려났다는 이야기조차 해주지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가택 연금’ 중이었고 그렇게 갇힌 상황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도행전을 전체로 놓고 보면 그 시작은 ‘창대’했지만 그 나중은 ‘미약’한 듯이 보입니다. 용두사미(龍頭蛇尾)라는 표현에 가장 잘 어울리는 구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지요.
그렇다면 왜 사도행전은 이렇게 초라하고 밋밋한 내용으로 끝을 맺고 있는 것일까요? 이것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가 무엇일까요? 첫 번째 이유는 사도행전 저자인 누가가 일어난 사건을 그대로 진술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자신의 입맛대로 사건을 각색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는 자신이 본 그대로, 초대교회의 모습과 바울 사도의 행적을 기록했습니다. 그때 바울 사도는 가택 연금이 풀리지 않은 매인 몸이었고, 바울 사도가 말씀을 전한다고 해서 수 십명, 수 백명, 수 천명, 온 도시가 다 믿고 회개하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역의 모습이 어쩌면 바로 이와 같이 초라하고, 밋밋하고, 지난한 일들임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가 복음 사역을 잘 감당하고, 자기 역할을 잘 수행하면, 당장이라도 획기적인 변화와 폭발적인 성장이 일어날 거라 기대합니다. 반면에 교회가 정체되어 있는 듯하고,역동적인 모습이 나타나지 않을 때, 교회가 복음 사역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것처럼 생각하거나 느끼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 마지막 장면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어떠합니까? 그 위대한 사도인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 즉 구약 성경을 가지고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열심을 갖고서 전했지만 그 결과는 24절 말씀과 같이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어”라고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복음에 저항하여 소동을 일으켰다던가 하는 극적인 저항과 반대도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바울 사도가 말씀을 전할 때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들이 있는 이 상황을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이 성취 된 사건이라고 까지 이야기 합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 된 사건이라 말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하나님 말씀이 가지고 있는 기능과 역할이 무엇인지를 확인합니다. 말씀이 선포 되는 자리에서는 언제나 두 가지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는 말씀을 듣고 반응하는 자들에게 ‘믿음’을 일으키는 일입니다. 말씀을 듣는 자들이 말씀을 통해 자라고, 튼튼해지고, 성장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다른 하나는 말씀을 거부하는 자들의 완고함을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나게 만듭니다. 말씀을 들으나 반응하지 않는 자들, 말씀을 들으나 받아 먹지 않는 자들, 말씀을 들으나 자신에게 적용하기 보다, 말씀을 판단하고, 평가하고, 저울질 하는 자들의 완고한 모습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마치 아덴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저 말쟁이가 무슨 새로운 말을 하나 보자”라는 식으로 들었던 아덴(아테네) 사람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지요.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사도행전의 마지막 모습이 바로 이러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도들의 시대가 끝나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교회들이 앞으로 어떤 사역을 감당해야 할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교회가 감당해야 할 복음 사역과 그 길은 화려하고, 역동적이고, 폭발적인 변화와 성장의 역사만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은 들어도 듣지 않고, 보아도 보지 않는 완고하고 굳어버린 자들을 향해 성경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도행전 마지막 구절도 이렇게 마무리 짓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행 28:31)
가택 연금 상황에서 바울 사도가 선택한 일은 특별한 기적과 역사를 발휘하여 가택 연금으로부터 풀려나고, 로마 제국을 뒤집어 엎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선택한 일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하고도, 거침 없이 전파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와 우리 교회는 바울 사도와 같은 모습으로 복음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교회와 복음 사역자들을 향해 바울 사도와 같이 담대하고 거침 없이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모습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혹 우리는 사도행전 초반의 모습에 머무르면서 그저 역동적이고, 폭발적이고, 극적인 모습만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게 우리는 교회가 진정 감당해야 할 밋밋하고, 초라하고, 단촐해 보이는 사역을 무시하고 터부시 여기는 모습은 없습니까?
<기도제목>
1. 교회의 사역이 언제나 역동적이고 활기차기만 한 것이 아님을 기억하며, 어떤 상황 중에서도 교회의 사명을 묵묵히 잘 감당해 나가는 교회가 되도록.
2. 오늘 차드 선교 탐방팀이 일정을 마무리 하고 출국 준비를 할 것입니다. 일정을 끝까지 잘 마무리 짓고 안전하게 귀국하도록.
3. [주보 기도제목] 환우들과 그 가족들의 아픔을 위로해 주시고, 치료해 주시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