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27(화) 새벽기도회
본문 - 사무엘하 13:20-39
<본문>
20 그의 오라버니 압살롬이 그에게 이르되 네 오라버니 암논이 너와 함께 있었느냐 그러나 그는 네 오라버니이니 누이야 지금은 잠잠히 있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라 하니라 이에 다말이 그의 오라버니 압살롬의 집에 있어 처량하게 지내니라
21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
22 압살롬은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그를 미워하여 암논에 대하여 잘잘못을 압살롬이 말하지 아니하니라
23 만 이 년 후에 에브라임 곁 바알하솔에서 압살롬이 양 털을 깎는 일이 있으매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을 청하고
24 압살롬이 왕께 나아가 말하되 이제 종에게 양 털 깎는 일이 있사오니 청하건대 왕은 신하들을 데리시고 당신의 종과 함께 가사이다 하니
25 왕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아니라 내 아들아 이제 우리가 다 갈 것 없다 네게 누를 끼칠까 하노라 하니라 압살롬이 그에게 간청하였으나 그가 가지 아니하고 그에게 복을 비는지라
26 압살롬이 이르되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려거든 청하건대 내 형 암논이 우리와 함께 가게 하옵소서 왕이 그에게 이르되 그가 너와 함께 갈 것이 무엇이냐 하되
27 압살롬이 간청하매 왕이 암논과 왕의 모든 아들을 그와 함께 그에게 보내니라
28 압살롬이 이미 그의 종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제 암논의 마음이 술로 즐거워할 때를 자세히 보다가 내가 너희에게 암논을 치라 하거든 그를 죽이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너희는 담대히 용기를 내라 한지라
29 압살롬의 종들이 압살롬의 명령대로 암논에게 행하매 왕의 모든 아들들이 일어나 각기 노새를 타고 도망하니라
30 그들이 길에 있을 때에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들을 죽이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다는 소문이 다윗에게 이르매
31 왕이 곧 일어나서 자기의 옷을 찢고 땅에 드러눕고 그의 신하들도 다 옷을 찢고 모셔 선지라
32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 요나답이 아뢰어 이르되 내 주여 젊은 왕자들이 다 죽임을 당한 줄로 생각하지 마옵소서 오직 암논만 죽었으리이다 그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한 날부터 압살롬이 결심한 것이니이다
33 그러하온즉 내 주 왕이여 왕자들이 다 죽은 줄로 생각하여 상심하지 마옵소서 오직 암논만 죽었으리이다 하니라
34 이에 압살롬은 도망하니라 파수하는 청년이 눈을 들어 보니 보아라 뒷산 언덕길로 여러 사람이 오는도다
35 요나답이 왕께 아뢰되 보소서 왕자들이 오나이다 당신의 종이 말한 대로 되었나이다 하고
36 말을 마치자 왕자들이 이르러 소리를 높여 통곡하니 왕과 그의 모든 신하들도 심히 통곡하니라
37 압살롬은 도망하여 그술 왕 암미훌의 아들 달매에게로 갔고 다윗은 날마다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슬퍼하니라
38 압살롬이 도망하여 그술로 가서 거기에 산 지 삼 년이라
39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
<본문 해설>
다윗의 아들 암논은 이복 동생 다말을 억지러 범하고 버려 버립니다. 20절, 다윗은 이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분노합니다. 사실, ‘심히 분노했다’ 는 표현 만으로는 다윗의 참담한 심정을 표현하기에는 한참 역부족으로 느껴집니다. 다윗이 분노 했다면, 그 분노에 합당한 조치가 뒤따라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그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습니다.
사실 다윗은, 밧세바 사건과 우리아 사건 뒤에, 그 어떤 회개도 없이,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시기 까지 1년의 시간을 보냅니다. 그 사이 밧세바는 다윗의 아내가 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범죄와 그 이후의 시간 속에서, 주변의 신하들과 자녀들은 다윗을 보고 어떤 마음을 품게 되었을까요?
성경은 그것이 무엇인지 명시하지는 않지만, 다윗의 범죄 이후에 다윗의 집안에 일어난 자녀들 간의 비극을 기록을 보면, 다윗이 저지른 죄의 영향력이, 자녀 들에게도 부정적인 영향력으로 미치기 시작했고, 동일한 죄가 답습되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다윗은, 암논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다윗은 참담한 심정으로 분노할 수 는 있지만, 아무 제재도 가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다윗은 회개 했고, 용서 받았습니다. 지금 다윗은,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으로, 백성들을 공의로 다스릴 명분과 능력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의 재판을 열 명분이 없습니다. 합벅적으로 암논을 벌하고, 억울한 고통에 짖눌려 있는 다말을 달래줄 명분이 부족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압살롬은, 자신의 분노를 숨긴채로, 암논에 대한 복수극을 꾸미기 시작합니다. 23절, 그 복수를 계획한 기간이 무려 2년입니다.
그렇게 ‘양털 깎는 축제’ 자리에 다윗와 왕자들을 초청하는데, 사실 다윗과 암논 입장에서는 내키지 않는 자리입니다. 그럼에도 압살롬은,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암논이 이 축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데, 결국 32절, 압살롬은 계획대로, 암논이 다말을 욕되게 한 날부터 결심 했던 복수극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외할아버지가 있는 그술 땅으로 도망갑니다.
오늘 본문의 복수극을 일으킨 암논과 사말 사건의 패턴을 보면, 다윗의 밧세바 사건을 동일하게 재현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보고 음욕이 발동했고, 자기 왕권을 이용해서 겁탈과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암논 역시, 다말을 보고 음욕을 제어하지 못했고,
아버지 다윗을 이용해서, 함정을 파놓고, 다말을 범했는데, 결국 이 죄가 압살롬의 살인죄까지 연결되고 맙니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 37절, 다윗은 날마나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슬퍼합니다.
이 슬픔은, 비극적인 가족사에 대한 슬픔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윗은 자신이 저지른 죄의 영향력이 이렇게 살아 역사한다는 사실에 얼마나 참담했겠습니까! 그 죄의 영향력을 아들들이 답습할 수 있도록 일종의 통로가 되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무너지는 겁니다.
물론, 죄를 저지른 당사자는 암논과 압살롬 입니다. 다윗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다윗의 죄가 가계의 저주처럼, 아들들에게 자동으로 흘러 들어간 게 아니다. 가계의 저주는 없습니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는데, 자녀가 자기 이가 시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성경은 분명히, 오직 자기의 죄로 인해서 심판 받을 뿐임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입장에서는, 암논과 압살롬을 보면서 자기 죄의 영향력을 보았고, 결국은, 암논과 압살롬의 죄를 자기 죄로 끌어 안고 스스로 가슴을 치며 책임을 통감하는 거다.
여러분, 죄의 권세는 이렇게 막강합니다. 만약, 다윗이, 암논을 적법하게 처벌하고, 다말의 명예를 회복시켰다면, 압살롬의 복수를 막을 수 있었을까요? 물론, 충분히 그럴 가능성도 있겠지만, 사실 압살롬의 복수는, 다윗이 암논을 처벌 하는지 안 하는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압살롬은, 20절과 22절에서, 이미 다윗의 반응과 처벌에 관계 없이,
다말을 욕되게 한 그 문제 자체로 이미 암논을 죽이기로 계획했을 뿐입니다.
여러분, 죄의 영향력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죄에 권세에 사로잡힌 이상, 그 누구도 이 죄를 스스로 통제할 수 없습니다. 죄는 한번 시동이 걸리면, 이미 계획된 끝을 향해 달려 갑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이 끝을 향해 달려 갈 뿐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암논을 징계한다고 해서, 이미 죽이기로 결심한 암논이 죽지 않는 이상,압살롬이 품은 복수의 마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죄는 우리의 생각과 통제를 뛰어넘는 권세와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래서, 단순히 벌 받지 않기 위해서, 반대로 하나님의 축복을 위해서 죄를 짓지 않는 차원이 문제가 아닙니다.
죄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답게 살아갈 힘을 완전히 빼놓기에 바쁩니다. 하나님의 자녀 다운 정체성을 드러내기에 우리를 주저하게 합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여전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 삶을 향한 갈망이 있고 소원이 있고,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지 못함에 우리를 곤고하게 만듭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붙들고, 하나님 나라를 위협하는 모든 이방 나라를 향해 달리면서 죄와 싸웠던 다윗 아니였습니까! 그런데, 죄의 권세에 사로잡힌 이후, 지금 다윗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드러낼 명분과 능력을 잃고, 죄의 비참한 영향력 아래에서 통곡과 슬픔에 거듭 잠겨 있습니다.
여러분, 이 죄의 심각성과 권세와 영향력이 절감 되십니까? 습관적인 죄이든지, 그 어떤 모양의 죄이든지, 때때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돌이키는 모습들이 왜 이렇게 미비할까요?
어쩌면, 우리는 내가 짓고 있는 죄가 이렇게 힘과 권세와 통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지고 우리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히 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여러분, 누가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려고 하겠나? 왜 다윗이 온 침상을 그렇게까지 눈물로 적시면서 나를 주 앞에서 멀리하지 마시고,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말아 달라고 회개 했겠습니까?
(시편 51: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그래서 바울도 (고전 15:31) “… 나는 날마다 죽노라 …”
<기도하기>
1. 죄를 쉽게 간과하는 모습은 없는지 돌아보며, 권세와 영향력을 깨닫게 하시고,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는 영적 민감함을 주소서!
2.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라서, 예수님께서 승리하신 십자가와 부활을 따라서 죄와 싸워 승리하는 하루 하루가 되게 하소서!
3. (주보) 고신 교회가 하나님, 성경, 교회중심으로 서 가게 하시고, 모든 모임에 복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