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04(월)
요한계시록 13장 1~10절(신p.411)
염덕균 목사
<본문>
◎ 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
2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3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
4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5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6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
7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9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10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해설>
우리는 요한계시록 12장에서 ‘큰 용’, ‘옛 뱀’, 곧 ‘마귀’, ‘사탄’이 등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큰 용’, ‘사탄’이 부리는 ‘두 짐승’ 중 첫 번째 짐승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 첫 번째 짐승의 가장 큰 특징은 ‘큰 용’, ‘사탄’으로부터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첫 번째 짐승은 이 능력과 보좌와 권세를 가지고 어떤 일들을 행할까요? 놀랍게도 이 짐승은 스스로가 마치 ‘하나님’인 것처럼 사람들이 바로 이 짐승을 경배하도록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7절 말씀인데요.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을 경배하더라”(계 13:7)
그렇다면 이 짐승은 어떠한 방법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경배하도록 만든 것일까요? 그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바로 이 짐승이, 자신이 지닌 권세와 능력으로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신’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이 신을 섬길 때에 그 신이 자신에게 ‘복’을 안겨다 주리라는 기대입니다.
분명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안겨다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섬기며,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로서 하나님과 교제 할 수 있다는 사실, 이 사실이 우리의 진정한 ‘복’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상관 없이 ‘복’이라는 것을 따로 주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시고, 우리를 하나님과의 사귐이라는 진정한 복의 자리로 초청하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복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 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목숨과 피 값으로 우리를 사셔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화목 시키시고 우리를 자녀와 백성 삼으셨기 때문에 가능한 복입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 부활을 통해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사탄의 무기인 죽음에 승리하셨기에 가능한 승리의 ‘전리품’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부리는 짐승은 우리가 이 ‘진정한 복’을 누리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이 짐승은 자신이 지닌 능력과 권세로 우리가 이 ‘복’을 누리는 것을 가로막고 훼방 놓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여러 가지 고난과 핍박과 환란이 주어집니다.
반면에 이 진정한 복을 포기하고 ‘짐승’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짐승’이 줄 수 있는 ‘복’을 허락합니다. 부요함, 배부름, 평안함, 만족, 쾌락, 유희, 여유, 화려함 등과 같이 크고 멋지고 화려하고 평탄한 삶을 그들에게 안겨다 줍니다. 그리고 자신이 안겨다 주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복’이라고 말을 하며, 자신이 진정한 ‘복’을 안겨다 주는 ‘하나님’, ‘신’이라고 여기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능력과 권세’을 부여받은 짐승이 행하는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그렇게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한 짐승은 이제 참 하나님을 ‘비방’합니다.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짐승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신성모독 하는 이름들’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짐승은 그가 지닌 이름답게 신성 모독 하는 말을 계속합니다.
그렇다면 이때 말하는 ‘신성 모독’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람들이 바라는 복은 짐승 자신이 줄 수 있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안겨다 주신 복은 복이 아니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을 안겨다 줄 능력도 의지도 마음도 없으며,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인해 겪게 되는 고난과 역경의 상황들은 바로 그 사실을 증거 해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짐승의 ‘신성 모독’에 미혹 되어 짐승을 ‘경배’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큰 용’, ‘사탄’이 부리는 짐승의 특징을 설명한 이후 사도 요한은 어떠한 말로 이 이야기를 일단락 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9절 말씀인데요.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계 13:9) 짐승이 가르치는 말들은 과장되고 신성 모독적이며 거짓을 진리로 위장하여 가르치는 목소리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짐승의 말에 영향을 받아서 미혹되고, 짐승을 경배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말씀을 바르게 붙드는 사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안겨다 주신 교제와 신분의 특권이야 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진정한 ‘복’임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따르는 사람, 그들은 결코 미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그 복음을 붙드는 것으로 인해 비방과 박해와 손해와 억울함, 여러 말 못한 어려움을 겪게 되더라 하더라도 인내 가운데 그 자리를 지킬 것입니다.
그것을 10절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귀 있는 자로서 말씀이 주어지는 자리에 신실하게 귀기울이는 우리 되길 바랍니다. 그렇게 ‘짐승’의 미혹에 넘어지는 자가 아닌 어떠한 상황 중에서도 믿음을 붙드는 가운데 진정한 복 안에 거하는 우리 모두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제목>
1. 짐승의 거짓된 가르침에 미혹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복을 누리는 우리 되길.
2. [주보] 말씀으로 연단되고 정결하게 되어, 우리 주님 오시기를 소망하고 기다리는 믿음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