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05(화)
요한계시록 13장 11~18절(신p.412)
염덕균 목사
<본문>
◎ 11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하더라
12 그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사는 자들을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13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14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15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16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해설>
오늘 본문은 ‘큰 용’, ‘사탄’이 부리는 두 번째 짐승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 번째 짐승의 주된 역할은 사람들로 하여금 첫 번째 짐승을 경배하도록 꾀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6장, 19장, 20장에서는 이 두 번째 짐승을 가리켜 ‘거짓 선지자’라고 말을 합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 되던 당시 로마 제국에는 ‘황제 숭배’가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었는데요. 여기서 말하는 ‘거짓 선지자’는 곧 ‘황제 숭배’를 종용하는 당대의 제사장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황제를 ‘위하여’ 기도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제국민들에게 황제를 ‘향하여’ 기도 하도록 종용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어떠한 방법으로 제국민들로 하여금 황제를 숭배하도록 만들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오늘 본문 13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큰 이적을 행하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큰 이적’과 ‘불이 내려오는 장면’을 거짓으로 꾸며서 보여준 것입니다. 예를 들어 황제의 모습을 본뜬 형상을 보여주면서 뒤에서는 복화술을 행하는 것을 통해 마치 황제의 형상이 직접 말하는 것처럼 꾸민다든지, 준비해둔 불꽃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도록 일종의 ‘마술’과 ‘술수’를 꾸며서 사람들을 현혹시켰던 겁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황제 숭배’라고 하는 거짓 예배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두 번째 짐승의 무기는 사람들에게 ‘거짓 예배’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이 ‘참된 예배’, ‘진정한 예배’를 경험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의 영혼이 참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고 거짓된 체험과 황홀경에 빠져서 허우적대도록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이 두 번째 짐승의 모습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도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정통 기독교로부터 벗어난 사이비와 이단 교회들을 포함하여, 과도하고 신비주의에 빠져 버린 교회 또한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들은 거짓된 예배와 체험을 제공함으로써 사람들이 성령과 진리로 드리는 참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지 못하도록 붙들어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짐승의 공격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두 번째 짐승의 공격은 단순히 ‘예배 생활’을 어지럽히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사람들의 일상까지 침투합니다. 오늘 본문 16-18절을 보면 사람들에게 ‘짐승의 표’를 나누어 주는데, 이 표를 지니지 않은 자들은 ‘매매’하지 못하도록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매매’, ‘사고판다’라고 하는 것은 ‘경제활동’을 의미하는 말이지요.
이것 역시도 당시의 ‘황제 숭배’와 관련지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세기 당시 로마 제국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놀랍게도 ‘무신론자’로 취급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삼위일체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존재도 ‘신’으로 인정하거나, 고백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황제 숭배’ 역시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로마 제국의 박해와 핍박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렇게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제국 내에서 기본적인 생활조차 영위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때 이 ‘두 번째 짐승’은 ‘짐승의 표’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황제 숭배’라고 하는 ‘거짓 예배’에 동참하는 자들에게는 ‘매매할 수 있는 권리’, 즉 로마 제국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삶의 기존적인 권리를 제공해 주겠다는 약속으로 사람들을 미혹했던 것입니다.
1세기 로마 제국과 비교해 보자면 현대의 우리는 소위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시대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다는 이유로 우리 삶의 기본적인 권리와 사회적 지위를 박탈 당하는 형태로 박해나 핍박을 받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이 두 번째 짐승의 위협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운 상태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비록 그 방식과 정도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하나 짐승의 공격은 여전히 행해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지금 이 시대에 두 번째 짐승의 공격은 참으로 교묘한 형태로 침투해 들어오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미혹에 넘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자들에게 삶의 기본적인 권리를 완전히 빼앗기는 형태가 아니라, 남들보다 조금 불편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붙드는 자들을 모든 사회적 지위와 관계로부터 완전히 단절시키지는 않지만, 이런저런 부분에 있어서 손해를 보도록 만듭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넘어집니다. 불편한 것을, 편한 것으로 바꾸고 싶어서, 손해 보던 것을, 손해 보지 않는 쪽으로 바꾸고 싶어서 신실함을 지키던 자리에서 약간의 일탈을 허용하는 자리로, 말씀을 진지하게 붙드는 자리에서 조금은 타협하고 양보하는 자리로 서서히 변해 가더라는 것이지요.
지금도 두 번째 짐승은 ‘거짓 예배’와 ‘일상의 지배’라는 무기를 가지고 미혹하고 넘어뜨릴 자들을 찾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가 우리의 진짜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지 않고, 우리 삶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견지 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두 번째 짐승의 미혹 아래에서 첫 번째 짐승을 섬기는 자리에 서게 될 지도 모릅니다.
<기도제목>
1. 우리의 영혼과 생활 모두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의 삶의 주권을 하나님께 내어드릴 수 있도록.
2. [주보] 새가족들과 전입한 성도들이 교회에 잘 정착하게 하시고, 말씀의 교제로 자라게 하시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