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11(월)
잠언 19장 1-12절(구p.931)
<본문>
◎ 1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입술이 패역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
2 지식 없는 소원은 선하지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잘못 가느니라
3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
4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
5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하는 자도 피하지 못하리라
6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
7 가난한 자는 그의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하지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
8 지혜를 얻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느니라
9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뱉는 자는 망할 것이니라
10 미련한 자가 사치하는 것이 적당하지 못하거든 하물며 종이 방백을 다스림이랴
11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12 왕의 노함은 사자의 부르짖음 같고 그의 은택은 풀 위의 이슬 같으니라
<해설>
잠언 19장에서 반복해서 다루는 주제 중 하나는 바로 ‘가난’에 관한 것입니다. 1절, 4절, 7절, 17절, 22절에서 이 ‘가난’에 관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선 4절 말씀을 볼까요?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 이 구절에 따르면 ‘재물’은 사람을 얻는 도구인 반면에, ‘가난’하면 주변에 사람을 잃는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7절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한 자는 그의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하지 아니하겠느냐” 보시는 바와 같이 ‘가난한 자’는 형제들과 친구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다고 말을 합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잠언 말씀은 결코 ‘가난’은 미덕으로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간혹 우리는 동화나 이야기,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서 ‘가난’이 미덕처럼 그려지는 상황들을 마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난’이라고 하는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불굴의 의지와 노력으로 현실을 극복하고 엄청난 성취를 이루어낸 사람들에 대해 아름답게 그려 놓은 이야기들은 우리 마음을 뜨겁고 뭉클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난 자체’가 미덕으로 여겨지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이 미덕인 것이 아니라 ‘가난’을 극복해 낸 노력과 의지가 선하고 아름답게 그려지는 것이지요.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결코 가난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 말씀은 가난을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왜 이 ‘가난’이라고 하는 문제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잠언 말씀이 바로 이 ‘가난’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미련함과 게으름의 ‘결과’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가난한 자들이 게으르고 미련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겠지요. 성경도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1절 말씀에서는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입술이 패역하고 미련한 자보다 낫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잠언 말씀이 경계하는 것은 ‘가난’이라고 하는 ‘현상’이 아닙니다. 잠언이 경계하는 것은 바로 그 ‘가난’을 불러오도록 만드는 게으름과 미련함, 불성실함입니다.
그렇다면 ‘가난’의 반대인 ‘부요함’과 ‘많은 재물’에 대해서는 성경은 어떻게 이야기 하고 있을까요? 성경는 부요하고 재물이 많은 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역시나 ‘아닙니다!’ 성경은 ‘부요함’, ‘많은 재물’, 그 자체를 ‘미덕’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4절 말씀에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한다”라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것도 ‘가난’과 마찬가지로 ‘많은 재물’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많은 재물’을 통해서 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재물을 통해서 많은 친구를 얻으려면, 그 재물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배만 불리는 데 쓰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고 나누는 자에게 자연스럽게 지지하고 따르는 자들도 많아지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6절 말씀은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성경 말씀이 말하는 ‘미덕’은 ‘부요함’, ‘많은 재물’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미덕’은 나눔과 베풂, 너그러운 마음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가난’을 가져오는 통로인 게으르고 미련한 삶을 경계 합니다. 나아가 ‘가난’을 극복하고 얻게 된 ‘부요함’을 가지고, 다른 이들에게 나누고 베풀기를 요구합니다. 이것은 비단 ‘잠언’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 성경도 이러한 사실을 잘 지적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 말씀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하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8절 말씀은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한결 같이 ‘가난’을 불러오는 ‘게으름과 미련함’을 경계하며 동시에 성실함과 근면함으로 이루게 된 많은 재물과 부요함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고 나누라’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이야기는 세상의 일반 윤리와 도덕도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닌가요? 굳이 성경 말씀이 아니더라도 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왜 잠언 말씀이 다루고 있습니까? 그것은 성실함과 부지런함, 그리고 가진 것으로 베풀고 나누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과 나아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고스란히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어제나 오늘이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또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그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수많은 날들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시면서 백성들을 치유하고 가르치시는 사역들을 반복해 나아가셨습니다. 이처럼 신실함과 성실함은 삼위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을 우리에게 나누어주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참된 평안, 안식, 사랑, 거룩, 복락 등을 우리에게 나누어주기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나누고자 하시는 그 마음, 우리에게 베풀고자 하시는 그 마음이, 우리를 창조하시는 능력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으신 것으로, 또한 잃어버린 그 형상을 회복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잃어버리고 놓쳐버린 그 특권들을 다시금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신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베풀고자 하신 그 마음, 우리에게 나누어주고자 하신 그 마음이, 우리에게 아들을 내어주시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이 말하는 성실함과 근면함, 그리고 베풀고 나누고자 하는 마음은 일반 세상의 윤리와 도덕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성실함과 그로 인해 얻게 된 것으로 베풀며 나누고자 하는 그 마음은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참 지혜자의 모습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성실함과 근면함으로, 또한 나누고 베풀고자 하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드러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제목>
1. 매사에 성실함으로 주의 뜻을 이루게 하시고, 우리가 가진 것, 받은 것, 소유한 것들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눌고 베풀며, 그렇게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드러내는 자들 되도록.
2. 변하는 세상 가운데서도 유일한 소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도록.